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komtle Sep 02. 2022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사랑이 답일까? 바닥을 봐야 다음 챕터가 보인다  #최신영화리뷰

스틸 컷=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굳이 지나간 추억을 일일이 더듬지 않더라도 눈길을 끄는 제목이다. 오슬로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흔하지 않는 노르웨이 영화, 주인공 율리에의 이야기를 12개의 챕터로 나누어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점 등이 이 작품의 독특한 매력이다.


스물아홉의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 노르웨이에도 한국처럼 아홉수가 있는 것인가. 잘 다니던 의대를 그만두고 미련 없이 돌아서 상담가, 사진작가, 작가 등 하고 싶은 일을 해보다 40대 성공한 만화가 ‘악셀’도 만나고 또래인 ‘에이빈드’를 만나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사랑이 답일까?


줄리에가 찾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에는 그것이 사랑일 수도, 또는 직업일 수도 있다. 쇼핑하듯이 직업과 애인을 바꾸는 줄리에가 다소 충동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에서 조언자가 아닌 주인공으로 살고 싶다며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새로운 것에 망설임이 자신을 내던지는 그녀의 모습이 오히려 부럽기까지 하다.





줄리에가 노르웨이 판 어른 아이라면,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 역시 한국판 어른아이일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방황하는 어른아이'를 양산해내는 경쟁 시스템은 노르웨이뿐 아니라 한국에 더 조건이 부합하기 때문이다. 줄리에가 끊임없이 자신을 찾는 이유, "난 내 삶의 구경꾼인 기분이야. 내 인생인데 조연 역할을 하는 것 같아."


한국 역시, 어떤 이유도 찾지 못한 채 입시로 학창 시절을 보내고 겨우 입학한 대학에서도 적성에 맞는지 고민하다 쫓기듯 취업하고 적당히 결혼을 한다. 결국 ‘문득 없어져 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한국판 율리에처럼 허무함에 빠진다.


이 영화를 보니 어른아이들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는 여정’은 비단 노르웨이뿐 아니라 만국 공통의 문제인 것 같다. 줄리에는 오히려 고민하기보다 하고 싶은 것에 자신을 내던진다.


모범생을 포기하고 ‘몸보다는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자’ 심리학을 공부하고, ‘예술은 자신의 적성에 맞는가?’하고 한 번 사진도 찍어본다. 인터넷에서 줄리에의 연애 고충 글이 인기가 많아지자 작가도 도전해 본다.


줄리에에게 있어, '사랑' 또한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실험이다. 결과적으로 늘 최악의 모습을 찍고 인생의 다음 챕터로 넘어가지만 말이다.


'사랑할 때 최악이 된다'는 것은 '사랑에 빠지면 처음엔 물불없이 빠져들다 이내 서로가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내 삐걱거리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틸 컷=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그래. 난 자기를 사랑해. 근데 사랑하지 않아.’


사랑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이 모순적인 말의 뜻을 경험적으로 이해한다. 이 영화는, 진부한 로맨스처럼 주인공들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을 향해 일관되게 달려가지 않고 줄리에의 의외의 선택으로 그 끝을 알쏭달쏭 알 수 없게 만들어 놨다.


로맨스 영화지만 사랑이 중심이 아니라 줄리에의 성장에 ‘사랑’이라는 정류장이 있다는 느낌이다.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질 무렵 사랑하는 이와 내가, 인생을 대하는 스탠스(stance)가 충돌함을 느낀다.


사랑하지만, 아니 사랑했지만 서로 다른 인생의 스텝(step)에 서있어 서로를 공감해 줄 수도, 고민을 들어줄 수도 없다. 그 또한 서로의 타이밍(timing)이 다를 뿐.



사랑할 때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낼 때'에도 감내해야 할 밑바닥을 보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제목에 오히려 ‘이중적인 의미’를 발견했다. '사랑할 때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뜻은, 나의 최악의 순간에 사랑을 하고 있거나 사랑할 때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세월이 흐른 뒤 시한부 삶을 사는 악셀을 만나 다시 '사랑'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초라하지만 ‘원래 그(녀)의 모습이었던’ 바닥까지 내보아야만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그 밑바닥까지도 비참하게 여기지 않고 감내해야만 사랑이 오래 머문다는 점이다.


‘불완전함’은 온전히 인간의 몫인지라 탈피할 수는 없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 최악의 인간인 채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면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 때 마침 사랑을 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치열하게 인생의 챕터를 살았으나 서로의 타이밍이 안 맞았을 뿐이라고.


율리에는 악셀과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지 않고 여기저기를 걷다가 아침 해를 본다. 자신을 채울 무엇인가가 되고 싶었던 율리에. 이미 모든 것을 이룬 악셀에게 율리에는 무언의 반항심을 느꼈고 ‘평생 카페에서 빵이나 굽는 사람’으로 사는 에이빈드에게는 무의미함을 느꼈다. 줄리에는 오히려 그 어떤 선택도 하지 않고 오슬로 거리를 웃으면서 행복을 만끽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는 굳이 ‘사랑’을 빼더라도 인생의 스텝에 쫓겨 주인공의 삶을 살지 못해 최악이라고 느끼는, 이 시대의 어른 아이들을 위한 영화이다.


또는 ‘사랑’을 포함해서, 사랑했지만 상대에게 최악이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그땐 그랬지’하며 웃어 보거나 타이밍이 어긋 났을 뿐 '찐사랑'으로 추억되는 이들을 이 영화를 보며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포스터=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https://tv.kakao.com/v/431121903

출처=무비톡(www.movietok.kr)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