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함께 여행한 두 명의 저자가 참여하였습니다. <오변의 여행일기>에서는 여행지에서의 감상을 오변이, <강쉡의 먹방일기>에서는 여행하며 먹었던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강쉡이 썼습니다.
운젠에서 버스를 타고 시마바라로 갔다. 운젠에 왔을 때부터 내리던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일단 호텔로 갔는데 로비에 아무도 없었다. 시마바라에서 호텔을 예약할 때는 선택의 여지가 아예 없었다. 예약할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밖에 없어서였다. 물론 일박에 수십만 원이나 백만 원을 넘게 쓸 수 있다면 좋은 곳이 있었겠으나 여행을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숙소에 그렇게 돈을 쓸 생각도 없고 쓸 수도 없었다.
우리가 예약한 곳은 1박에 무려 1만 엔이나 하는 곳으로 일본에서 우리가 묵었던 호텔 중에서는 꽤 비싼 축에 속한다. 그런데 보통 호텔은 물론 하다못해 게스트하우스를 가더라도 오전에 체크인이 안 되더라도 적어도 짐은 맡아 준다. 가뜩이나 짐 보관료가 비싼 일본인데 숙소에서 짐을 맡아주지 않으면 여행객은 비싼 보관료를 내고 어디엔가 짐을 맡겼다가 또 체크인 시간 이후에 짐을 찾아서 다시 숙소로 와야하는 불편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간 호텔은 호텔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정말 아무도 없었고,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고, 호출 벨을 눌러봐도 답이 없었다.
이 호텔은 쇼와 시대(1926년~1989년)가 연상되는 인테리어였는데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앤틱 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마치 조선말이나 일제강점기 문화재 건물 속에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습니다"라며 생활 집기와 가구들을 복원해 전시해 놓은 것 같았다. 야인시대 촬영장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호텔 로비에서 언젠가 직원이라도 나오겠거니 싶어 한참을 기다리다가 결국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쪽 벽 핸드레일에 자전거 자물쇠가 몇 개 달려 있어서 저기다 짐을 보관하나 싶어서 그냥 캐리어를 묶어 놓고 나왔다.
그렇게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일단 밥을 먹으러 나갔다. 강쉡이 꼭 찾아가야 한다는 식당이 있었다. 빗속을 뚫고 구글 지도에 의지해 찾아갔더니 문이 닫혀 있었다. 문에 붙어 있는 안내를 보니까 공사중이라며 다른 지점으로 가라고 주소가 써 있었다. 그런데 빗속을 뚫고 걸어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밥 한 끼를 먹자고 택시까지 타서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짜증을 내고 있는데 어떤 여자분이 아는 체를 하면서 매우 반가워했다. “누구지? 누구지? 사람을 잘 못 본 건가?”라고 하고 있는데, 알고 보니 전날 묵었던 운젠 숙소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반가운 것은 둘째치고 너무너무 신기했다. 운젠도 아니고 운젠에서 버스로 한 시간은 가야 하는 시마바라 길거리 한복판에서 마주치다니!
우리에게 어디 가냐고 묻길래 어디 어디 식당에 갈까 말까 한다고 하니까 차가 있다며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빗길에 차를 얻어 타고 편하게 원하는 식당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식당은 생각보다 꽤 멀었다. 빗속에서 걸어가기는 어려운 곳이 맞았다. 사람 인연이란 참 희한하다.
한번은 예전에 독일 하이텔베르크를 여행하다가 아침에 다리 위에서 대학원 동기와 딱 마주쳤는데 그 친구는 가족, 친척들과 함께 패키지여행 중이었다. 우연히 같은 시기에 유럽에 오고, 그 와중에 패키지로는 잘 가지도 않는 하이델베르크에 와서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 서로 마주치다니… 근데 그 친구는 요즘 뭐 하며 지내나 모르겠다. 아무튼 운젠에 다시 가면 그 직원이 여전히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
시마바라는 어찌보면 정말 기구한 곳이다. 1991년 운젠 대분화 때 운젠 시는 큰 피해가 없었지만 시마바라 시에는 큰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17세기 일본 역사상 최초의 민중의 대규모 봉기인 ‘시마바라의 난’으로 수만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역사적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고 쿠데타도 없어 역사적으로 왕조가 바뀐 적이 없는 독특한 나라다. 현재에도 대규모 시위는 거의 없다. 그래서 시마바라의 난은 일본 역사에서 아주 특이하고도 중요한 사건이다. 18세기말에는 화산의 대규모 분화로 15,000여 명이 사망하였다. 시마바라는 정말 고난과 역경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시마바라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는 두 가지인데 ‘물의 도시’라는 별명과 역시 ‘시마바라의 난’이다.
시마바라는 물이 풍부한 도시다. 바다 한가운데나 강 위에 지은 도시도 아닌데 정말 물투성이다. 수로가 길 양 가생이에 나 있을 때도 있고 한가운데 나 있을 때도 있다. 이 풍부한 물을 모아 연못을 만들어 잉어도 키우고 멋들어진 정원을 꾸미기도 하고, 생활 용수로도 썼었고, 공용 싱크대로도 썼다. 마을 어디에서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참 잠이 잘 올 것 같다.
이곳은 정말 조용하고 한적하다.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어 검게 되어 버린 돌담길 사이를 산책하고 있으면 물 흐르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관광지 같으면서도 그냥 보통 사람 사는 주택가 같은데 갑자기 문화재가 “안녕?”하듯 하나씩 튀어나온다. 그런데 그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재들은 주택들과 위화감 없이 어우러져 있다. 그냥 동네 자체가 그냥 유적지 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동네 길을 걷다가 <시메이소 四明荘>로 갔다. 시메이소는 ‘잉어가 헤엄치는 거리’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거리 중간에 있는데 메이지 후기부터 다이쇼 초기까지 의사였던 이토 모토조가 별장으로 건축하여 현재는 국가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정원을 아주 멋들어지게 꾸몄고 연못에 커다란 잉어들이 헤엄치는데, 특이하게도 정면과 왼쪽의 다다미를 돌출시켜 연못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운치 끝판왕이라서 전원주택을 짓는다면 이렇게 짓고 싶다. 물론 관리는 못 하겠지만…
집 안으로 들어가면 전통 기모노를 입은 여주인이 차를 내 오는데 집안을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다. 생각보다 사람이 좀 있지만 시마바라 자체가 관광객이 워낙 적어 북적이는 건 아니다. 입장료가 좀 세서 살짝 고민이 있었는데, 여기서 우리가 타야 하는 구마모토행 배편의 티켓 할인권을 받을 수 있어서 그것까지 생각하면 혜자에 가까웠다. 여주인은 일본식으로 좀 과하다 싶게 친절해서 우리가 나갈 때에는 엎드려 절을 하는데 이게 전통문화라지만 부담스러웠다.
발길 닿는대로 동네를 구경하다가 <하마노카와 샘물>에 갔다. 이곳은 공중 싱크대 같은 곳이다. 네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물이 콸콸 나오는 것이 물의 도시라는 수식어가 허언이 아니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나 꽤 흥미로운 곳이다.
우리는 길거리에 있는 공중 족욕탕에서 족욕을 하며 잠시 다리의 피로를 풀고 드디어 시마바라 성으로 갔다.
시마바라 성은 시마바라의 상징 같은 곳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산 위에 이 거대한 건축물이 떡 하니 있으니 여행자라면 이 것을 보고 안 갈 수가 없다. 일본의 여느 성처럼 굉장히 깊고 살짝 무서워 보이는 해자가 파 있고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는 무려 높이 33m의 거대한 천수각이 있다. 현존하는 일본의 천수각 중 세 번째로 높다. 이 천수각은 메이지유신 때 해체되었다가 1964년에서야 복원되었다고 한다.
시마바라 성은 1618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4년에 완공되었는데 이곳의 영주는 우리도 이름을 알만한 영웅급도 아니고 시마바라라는 지역 자체가 변방의 작은 도시다. 이러한 곳에 어떻게 이렇게 압도적인 규모의 성이 축조될 수 있었을까. 당연하게도 주민들을 착취한 결과이고, 결국엔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된다.
원래 시마바라를 다스렸던 가문은 기리시탄이었던 아리마 가문이었다. 그런데 아리마 가문의 영주인 아리마 나오즈미가 노베오카로 전봉 되면서 마쓰쿠라 가문이 새로 들어오게 된다. 마쓰쿠라 시게마사는 전임 영주와 달리 기리시탄을 탄압하는데 운젠 지옥의 그 뜨거운 물로 고문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주민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였으며, 멀쩡한 성을 폐성시키고 거대한 규모의 시마바라 성을 축조한다. 마쓰쿠라 시게마사의 아들인 가쓰이에가 영주가 되자 아버지보다 더한 폭정을 벌이는데, 결국 1637년 참다못한 약 2만 명의 기리시탄을 중심으로 한 주민들은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그러자 시마바라 번에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3천 명의 군사를 보내지만 패배하였고, 결국 영주는 막부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막부의 군대가 시마바라까지 오는 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어서 반란군 내부에서는 아예 나가사키까지 장악을 해서 농성전을 벌이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여러가지 사유로 이내 포기하게 된다. 대신 반란군은 당시 폐성이었던 하라성을 보수해 농성전을 펼치고, 결국 막부의 진압군을 궤멸시키기에 이른다. 그러자 막부에서는 무려 12만 5천 명이라는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어 하라성 전체를 봉쇄해 버린다.
외부로부터 봉쇄당한 반란군은 식량이 떨어지자 해초로 연명하며 버티고 있었다. 반란군이 당시 가톨릭 포교에 적극적이었던 포르투갈의 원군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포르투갈과 전쟁 중이었던 네덜란드는 반란군을 도울 것으로 예상되는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억제하려는 판단이었는지 막부군을 도와 범선 두 척을 보내어 바다에서 하라 성 안으로 함포사격을 하였다. 이제 바다 쪽으로도 나갈 수 없게 되었고 성 안에서 버티는 것도 어려워진 반란군은 심리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었다. 다만 막부 내부에서는 내란을 진압하는데 외국인의 도움을 받는 것에 비판적인 의견이 많아 네덜란드의 원조는 금방 중단된다.
반란군은 결국 진압되었고 반란군을 피해 숨어버리거나 타지로 도망갔던 예전 주민들은 살아남고 반란군과 도망가지 않고 있었던 주민들은 모두 막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 와중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기리시탄은 더 깊숙이 숨어 ‘기쿠레 기리시탄’이 된다.
시마바라의 난 이후 막부는 가톨릭을 더욱 가혹하게 탄압하였고 쇄국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포르투갈과의 국교를 단절해 1670년에 포르투갈에서 일본에 공식 사절단을 보내자 선원을 포함해 57명을 처형하고 배를 불살라 버렸다. 막부는 이 중 겨우 몇 명만 본국으로 돌려보내면서 “앞으로 또 한 번 일본에 상륙을 시도한다면 왕이나 기리시탄들이 믿는 신이 온다고 할지라도 모두 똑같은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라며 경고를 하기에 이른다.
당시 네덜란드는 가톨릭을 믿었던 포르투갈과 달리 개신교를 믿고 있었고 상인들은 포교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데다가 막부를 지원까지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막부는 네덜란드 상인만 예외적으로 나가시키의 데지마에서 교역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렇게 포르투갈에 의해 건설되던 데지마에 네덜란드 상인이 거주하게 된 것이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시마바라의 명물 <구조니>는 어묵과 연근 등을 넣은 떡국인데 시마바라의 난 당시 먹을 것이 부족한 반란군이 만들어 먹은 것이라고 하고, 시마바라 소면은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한 후 인구가 급감하자 반강제로 이주해 온 히로시마 사람들에 의해 전해져 온 것이라고 한다.
이 조용하고 한적한 작은 도시가 17세기 격변하는 일본의 역사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시마바라 성에 들어가는 입구는 가파른 언덕을 지나야 하는데 우리가 여기가 입구가 맞나 싶어서 두리번거리고 있자 주차장을 관리하는 아저씨가 나와서 굉장히 적극적으로 설명을 해 주셨다. 찾아오는 외국인이 별로 없어서 반가워서 그런가 싶었는데 올라가 보니 과연 이 압도적으로 거대한 성을 보러 오는 관광객이 적어도 너무 적었다. 우리 빼고 한 두 팀이나 있었을까. 기념품 매점에 들어가면 뭐라도 하나 사 가지고 나와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그냥 구경만 하다 나오면 민망할 것 같아서 그냥 밖에만 있었다.
우리는 성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사실 성의 입장료도 비쌌지만 복원하면서 내부는 엘리베이터도 설치하는 등 그냥 일반 현대식 건물처럼 꾸며놓아서 흥미가 없었다. 게다가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별로 재미가 없는 박물관처럼 되어 있다고 해서 딱히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우리는 동네를 거닐며 <사무라이 집>도 들어갔다. 사무라이 집이라고 해야 대단한 것은 아니고 소박한 하급무사의 집이다. 아주 소박하다. 입장료는 없고 주위에 지키는 사람도 없지만 쓰레기 하나 없이 관리가 잘 되어 있다.
여기가 유적지라거나 혹은 관람이 가능하다라는 표지판이 없으면 비슷하게 생긴 집은 그냥 실제로 사람들이 사는 집이다. 문화재와 일반 주택이 위화감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집집마다 다들 아기자기하게 꽃이나 나무도 심고 소품으로 장식도 했는데 지나가며 남의 집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리는 슬슬 걸어 <공방 모모>라는 곳으로 갔다. 건물이 파란색이고 이발관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데 옛날 이발관을 개조하여 지금은 카페로 사용하고 있다. 건축한 때가 다이쇼 12년, 즉 1923년이라고 한다. 카페에 들어가면 옛날 이발관 시절의 의자와 거울, 앤틱 한 소품들이 있다. 아주 어렸을 적에 갔었던 동네 이발관도 같은 의자가 있었는데 진짜 오랜만에 보는 가구들이었다. 조명도 예쁘고 예스러운 분위기도 좋아 차 한 잔 마시고 가기 딱 좋은 곳이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구경하고 있는데 동네 할아버지가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며 커피를 시킨다. 그리고서 주인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종이 신문을 펼쳐서 읽으셨다. 멋있는 할아버지였다.
그렇게 관광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는데, 이 비싼 호텔은 직원만 친절할 뿐 시설은 오래됐지, 방은 좁지, 와이파이는 잘 안되지, 정말 뭐 하나 되는 게 없었다. 아니 인터넷이 안되면 외국인은 뭘 하라고… 그럼에도 1박에 무려 만 엔이라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인터넷으로 예약할 수 있는 다른 숙박시설이 너무 없어서일 것이다.
시마바라는 정말 조용하고 볼거리, 먹을거리가 풍부한 멋진 곳이라 숙박과 교통만 해결하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것 같다. 좀 더 욕심을 내자면 차라리 사람들이 여기를 잘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관광객이 많아지면 이 곳의 조용하고 한적한 풍취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하기 계획할 때부터 기대가 많았던 시마바라에 왔다. ‘물의 마을’이라고 불릴 정도로 용수(샘물처럼 솟아나는 물)가 풍부하다. 거리 여기저기에 약수터가 있고 주택가에서는 지금도 용수를 생활수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예스러운 거리와 건물을 보존한 곳이 많아 거리만 걷고 있어도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오전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히메마츠야 본점>에 가려고 미리 알아놨었는데 막상 가 보니 내부공사로 문이 닫혀있었다. 조금 허탈해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 등을 톡톡 두들겼다. 운젠에서 친절하게 맞이해 준 여직원분이었다. 깜짝 놀라 반가워하며 물어보니 시마바라 토박이분이었던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몰랐던 히메마츠야 분점을 차로 데려다주고 족욕하는 관광지까지 알려주었다. 너무 감사한 인연이었다.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기념 촬영을 요청해 같이 사진도 찍었고 기분 좋게 여행을 진행할 수 있었다.
구조니는 시마바라의 명물 떡국이다. 일본의 일반적인 떡국과 달리 다양한 고명이 푸짐하게 들어간 산해진미 요리다. 1637년 시마바라의 난 때 지도자인 아마쿠사 시로가 병사들의 식량으로 농민들에게 만들 한 것이 시초라 전해진다.
표고버섯, 참나물, 붕장어살, 닭가슴살, 연근, 우엉, 어묵, 얼려서 말린 두부(고야 도후) 등 다양한 고명에 몰캉몰캉한 떡이 별미다. 우리나라 떡과 다르게 엄청 쫀득한 수제비 반죽 느낌이다. 국물은 해물 베이스의 굉장히 깔끔한 맛이다. 세트로 주문하니 달달한 유부초밥과 디저트 과일까지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한가롭게 시마바라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다행히 비가 세게 오지는 않아 돌아다니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한국에서도 카페는 잘 가는 편이 아니데 이번에 꼭 들리고 싶은 곳이 있었다.
빈티지의 끝판왕인 공간. 시마바라에는 옛날 건물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 많은데 이 카페 역시 그중 하나다. 이발관이었던 옛 건물을 개조해 꾸며 이발소에서 쓰던 의자, 거울, 조명 같은 소품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아주 멋스럽다. 접시, 물 잔, 티스푼 마저 빈티지로 맞춰져 있어 영화 세트 안에 있는 기분이다.
빈티지한 커피잔에 담긴 쌉싸름한 커피와 진하고 꾸덕한 레어 치즈 케이크를 한 세트로 즐길 수 있다. 칸자라시는 작은 찹쌀경단을 깨끗하고 흐르는 물에 차게 해 달콤한 시럽을 넣어 먹은 향토간식이다. 깨끗한 물로 만든 떡은 쫄깃쫄깃하고 달콤한 시럽이 기분 좋게 입에서 맴돈다.
조용한 마을의 여유로움과 옛 건물, 어딜 가도 깨끗한 물이 흐르는 풍경, 시마바라는 기대 이상으로 즐거움을 주었다. 단 시마바라 시내의 숙소는 예스러운 건물에 구하기도 힘든 데다가 퀄리티 대비 가격도 비싸니 잘 찾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