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일이 지옥이다,
운젠 지옥

by 평택변호사 오광균
이 글은 함께 여행한 두 명의 저자가 참여하였습니다. <오변의 여행일기>에서는 여행지에서의 감상을 오변이, <강쉡의 먹방일기>에서는 여행하며 먹었던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강쉡이 썼습니다.


오변의 여행일기


나가사키에서 버스를 타고 운젠으로 갔다. 버스가 하루에 세 편밖에 없어서 놓치면 큰 일이라 아침 일찌감치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래서 그런지 실제 탑승 시간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꽤 오래 버스를 탄 듯한 느낌이었다. 버스터미널은 굉장히 낡아서 7,80년대 분위기였다.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는 나가사키의 단면을 보는 듯 했다.


운젠으로 가는 길에는 '오바마'라는 곳을 거친다. 명칭이 미국 대통령 이름이라서 화제가 되었는데 실제 오바마 대통령이 방문했는지는 모르겠다. TV 여행 프로그램에서 오바마를 본 적이 있는데 동네 전체가 김이 펄펄 나는 신기한 동네였다. 그래서 그냥 산 동네이겠거니 했지만 버스에서 본 오바마의 풍경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어촌 마을이었다.


운젠이나 오바마, 그리고 다음에 갈 시마바라 모두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세 온천 모두 인근 다치바나 만 해저에 있는 마그마 방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그마 공간과의 거리에 따라 화산가스의 성분이 달라져 세 온천의 수질과 색상에 차이가 있다고 한다.


운젠에서 유명한 것은 역시 운젠 지옥이다. 고온의 황화수소가 지표의 암석을 녹여 하얀 진흙을 만들고, 온천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주변 일대를 뒤덮은 모습이 마치 생명체가 없는 세상처럼 보이기 때문에 지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도 황화수소에 강한 철쭉류나 하늘지기와 같은 식물들이 분포해 독특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이런 ‘지옥’ 구경을 참 좋아한다. 매일매일이 지옥 같다가도 매일이 지옥인 진짜 지옥에 오면 힐링이 된다. 내가 뽑은 일본 3대 지옥은 노보리베쓰, 운젠, 벳부다. 사실 이 세 곳 빼고 ‘지옥’이라고 불리는 곳은 잘 모른다. 위 세 지옥 중에서 운젠지옥은 가장 관광객이 적고 가볍게 산책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나머지 두 곳은 한국인과 중국계 관광객이 너무 많아 일본이라기보다 마치 한국 어디에 중국인 단체관광객과 약간의 일본인 개별관광객이 있는 곳 같다. 이중 노보리베쓰는 무섭도록 거대한 자연을 느낄 수 있고, 벳부는 자연보다는 사람이 개발해 낸 테마파크 같은 느낌이다.


운젠의 지명은 운젠다케(운젠산)에서 나왔는데 운젠다케는 1991년부터 1995년까지 화산활동 화산활동이 계속되었던 활화산이다. 1991년에 있었던 분화 때에는 구경하는 사람들과 기자들이 많이 몰려 왔기 때문에 영상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바로 그때 대규모 분화가 일어나 무려 4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우리가 이번에 묵은 숙소는 투숙을 하면서 일도 함께 할 수 있는 곳으로 코워킹스페이스였다. 그런데 가격이 굉장히 저렴한 데다가 객실이 서너 개 밖에 없었다. 그에 비하여 시설이 세련되고 깨끗한 데다가 객실마저 아주 넓어, 대체 사장님이 이걸로 돈을 벌 수는 있을까 걱정될 정도의 훌륭한 숙소였다. 게다가 마치 산호초 해변을 보는 듯 푸르고 아름다운 오시도리노 연못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너무도 멋진 곳이었다.


0E45953F-D33A-42B1-B570-C1A56912A383_1_201_a.jpeg 숙소에서 본 오시도리노 연못


우리는 숙소에서 나와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가 오붓이 운영하는 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운젠지옥을 산책했다. 날씨요괴 때문인지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다행히 주룩주룩이 아니라 부슬부슬 정도라서 차라리 더운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운젠 지옥은 지옥답게 유황가스의 구운 계란 냄새 같은 묘한 냄새가 솔솔 나는데 산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오고 땅에서는 끓는 물이 실개천처럼 흐르는 곳이다. 산책길 중간에 돌로 된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데 지열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공간이다. 막 앉았을 때에는 그저 미지근하다 정도였는데 조금 있으니 후끈후끈해서 찜질하는 기분이었다.


운젠 온천은 아주 오래된 온천으로 701년에 만미지(만명사) 절이 건립되었을 때 개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온천지로 개발된 것은 약 350년 전이며, 에도 시대 때부터도 서양에 알려져 펄벅, 헬렌켈러도 방문한 곳이다. 1934년 일본에서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은 굉장히 유명할 것 같은 곳인데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아주 조용하고 여행자를 위한 편의 시설도 별로 없다.


운젠은 원래 한자로 ‘온천산’이라고 쓰고 ‘운젠 산’이라고 읽었는데 후에 한자만 ‘운선’이라고 바꾸었다. 동네 이름이 온천이니 그만큼 온천에 진심인 고장이다. 천질은 강한 산성의 유황천인데 투명하거나 백색의 두 종류가 있고 독특한 유황냄새가 나며 산미가 강하다. 습진이나 화상 등 피부병 전반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곳은 과거 가톨릭 순교지라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개울마저 펄펄 끓는 이곳이 순교지라고 하니 어떠한 고통을 받았을지 상상하는 게 참 힘들다.


IMG_2526.gif 수증기가 가득한 운젠 지옥 입구
530224BB-2EFB-48B9-B342-4636F57D649C_1_201_a.jpeg 높은 곳에서 본 운젠지옥


운젠 지옥을 산책하고 나서 일본의 온천 마을이면 항상 있는 무료 족욕탕이 나온다. 이곳에서 잠시 족욕으로 다리의 피로를 풀었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항상 가방에 작은 수건을 가지고 다녔는데 일본을 여행할 때는 이 수건이 필수다. 일본인들은 워낙 온천을 좋아해서 온천 마을이 아니더라도 종종 무료 족욕탕을 만나게 되는데 발을 닦을 수건이 없으면 즐기기 어렵다.


우리는 온천 물에 발만 담그다가 아예 본격적으로 온천을 해야겠다 싶었다. 구글지도를 보고 평점이 좋은 퍼블릭 온천을 찾은 끝에 한참을 걸어 내려가 <운젠요카유>라는 곳에 갔다.


이곳은 알고 보니 숙박도 되는 곳이었는데 외관이 꽤 크고 주차공간도 많았다. 우리는 이미 예약한 숙소가 있으니 온천만 이용하였는데 전형적인 일본 공용 온천이었다. 일본의 온천은 한국으로 치면 아주 옛날 동네 목욕탕을 생각하면 그것보다 더 작고, 좁고, 오래됐다. 내가 아주아주 어렸을 적, 그러니까 입욕료가 1000원 안짝이던 80년대의 동네 목욕탕도 넓찍한 탕이 두 개 씩은 있었던 것 같은데 일본의 보통 동네 온천탕은 대여섯명만 들어가기에도 서로 좀 민망한 정도의 크기다.


<운젠요카유>는 실내탕과 노천탕이 있는데 실내탕은 네 명 정도는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고, 노천탕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 집 욕조보다 좁은 것 같았고 나머지 하나는 그래도 두 명이 다리를 접고 들어갈 수는 있는 크기였다. 그런데 노천탕 바로 옆에 숙박시설인지 주택인지가 있어서 그냥 발코니를 열면 탕을 볼 수 있는 위치였다. 일본은 유독 온천에서는 알몸 노출에 굉장히 관대하다. 탕은 살짝 계란 냄새가 나는 유백색이고 미끈미끈했다. 구체적인 효능은 몰라도 그냥 피부가 좋아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천욕을 한참 하고 나서 휴게실에서 몸을 식히며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봤던 커피우유를 마셨다. 일본에서 온천을 하고 나면 꼭 커피우유를 마셔야 한다. 딸기 우유도 있고 다른 음료도 있고 아이스크림도 있으나 역시 커피우유가 최고다. 그런데 커피우유는 한국의 것과 달리 진한 우유맛이 아니라 물이 많이 들어간 묽은 음료다. 우유가 많이 들어가지도 않은 음료 치고는 가격이 착하지도 않은데 입이 텁텁해지지 않아서 좋기는 했다.


오랜만에 안마의자도 해 봤다. 일본의 안마의자는 꽤 유명해서 파나소닉 같은 유명 전자제품 회사에서도 만들고 우리나라 대기업도 일본의 것을 수입해서 판매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하겠지 싶었는데 생각보다 물렁물렁하고 우리나라의 안마의자처럼 꼭꼭 눌러주지는 않는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호텔이나 다른 좋은 온천에서도 몇 번 이용해 봤는데 모두 물렁물렁해서 세게 꽉꽉 눌러주는 한국식 안마의자를 선호하는 우리에게는 많이 실망스러웠다.


6CA192A5-61E1-4BE9-BBC7-3162928ADB4B_1_102_a.jpeg 온천 타월과 커피 우유


온천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겐세이누마>라는 습지대를 산책했다. 온천지역에 생선된 습지대로 독특한 식물들이 군락을 이루어 자라고 있다고 한다. 사실 식물에 문외한이라 설명을 봐도 잘 모르겠지만 산책을 하기에는 좋았다.


<겐세이누마> 습지 근처에는 <이하나사쿠야히메 신사>가 있는데 ‘히메(일본어로 레이디라는 뜻으로 지체 높은 여성에 대한 경칭이다)’가 붙어있지만 남신과 여신을 모두 모시는 곳이라고 한다. 남성과 여성의 좀 민망한 상징물을 모시고 있어 호기심이 생겼으나 가는 길이 워낙 외지고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아 가다가 그냥 돌아왔다.


561D2C1B-DAA5-4C06-A069-63C73EFE323B_1_201_a.heic 겐세이누마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었다가 나와 저녁을 사 먹고는 돌아오는 길에 주택가에 있는 <유노사토 온센>에 갔다. 이곳은 진짜 동네온천으로 외국인이 이곳에 찾는 일이 많지 않았는지 입구를 지키는 아저씨가 수건을 가져가야 한다던가 수건을 탕 안에 넣으면 안 된다던가 하는 규칙을 아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동네 온천에 가는 외국인이면 다 아는 규칙인라 살짝 잔소리지만 뭐 나름 세심한 배려같기는 했다.


여기는 찐 동네 목욕탕이어서 실내탕만 있었고 일본 어르신 두어 분이 목욕 중이었다. 절반은 탕이고 절반은 씻는 곳이었는데 탕 크기는 우리 집 작은 방 정도 될까 싶었다. <운젠요카유>가 유백색의 부들부들한 물이었다면 여기는 구릿빛의 센 물이었는데 굉장히 뜨거웠다. 어르신들이 딱 좋아할 만한 화끈한 온천이었다. 그렇게 1일 2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4BE0FDC4-B51B-4DFF-AD25-5A8E042C6521_1_201_a.heic 유나사토 온센. 동네 어르신들이 있었다


운젠은 정말 좋은 곳이었다. 동네가 아주 조용하고 사람들도 호의적이고 친절했다. 유명 관광지를 가면 일단 사람이 많아 정신이 하나도 없고 상인들에 밀려나 주민들도 없는데, 이곳은 마치 그냥 일본의 어느 주택가 동네를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상당히 큰 규모의 오시노리노 연못의 풍경은 아주 환상적이었다.


운젠에 오면 산에서도 김이 폴폴 나고 하수도에서도 김이 폴폴 난다. 주변에 마트는커녕 그 흔한 편의점도 없다. 이렇게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한 일주일 묵으면 힐링에 힐링을 받아 없던 병도 나을 것 같았다. 대신 심심해 죽을 수도 있다. 진짜로 온천밖에 할 게 하나도 없다.



강쉡의 먹방일기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운젠지옥의 풍경은 경이로웠다. 안개가 살짝 낀 바위산에는 끓는 온천물 계곡이 흐르고 그사이로 열기가 뭉개 뭉개 피어나고 있었다. 다른 지옥 관광지처럼 사람이 많지도 않고, 유치한 도깨비상이 있지도 않았다. (도깨비상이 유치하다고 말해도 있으면 옆에 가서 사진 찍는다)


분노지 | 텐동정식과 소바정식


운젠지옥 지역의 최고 맛집이라 자부할만한 곳이다. 노부부가 운영하시는데 정갈한 가정식 정식이 주메뉴다. 따뜻한 환대와 함께 엽차를 내어 준다. 주문하면 메밀면을 데치고 튀김을 튀겨 주는 집이기 때문에 사람이 없더라도 시간이 걸려 여유 있게 방문하는 게 좋을 듯하다. 양이 많지는 않다.


IMG_2512.jpeg 분노지 식당 내부

소바정식은 깔끔하게 튀긴 튀김이 접은 종이 정갈하게 담겨 나온다. 바로 데쳐 매끄러운 면에 진한 쯔유가 깔끔하니 잘 어울린다. 손질한 새우로 튀긴 튀김은 오동동 하니 바삭하고 다른 채소 튀김들도 깔끔해 소바와 잘 어울린다.


IMG_1252.heic 소바정식

텐동정식은 쟁반에 조그마한 도시락에 담겨 나오는 음식이 정갈하다. 짭조름한 소스가 뿌려진 갓 튀긴 튀김이 따끈하다. 고슬고슬한 밥맛에 한번 놀란다. 물이 좋아서 그런가 밥에서 단맛이 난다. 곁들인 미소장국에는 유부와 포슬포슬한 감자가 들어있다.


IMG_2516.jpeg 텐동정식


운젠은 온천지역답게 족욕탕, 대중탕이 많이 있다.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면 일본 대중탕은 적극 추천한다. 가격도 저렴하고 휴게 시설도 넓고 쾌적하다. 목욕 후 덥혀진 몸을 시켜주는 병우유는 국룰이다.


일본 시골지역에서 저녁 식사를 할 식당을 찾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물론 이자카야는 있지만 술 마실 생각이 없고 넉넉 양의 식사를 하고자 하면 조금 일찍 움직이는 게 좋다. 운젠지옥 근처에는 지역상점 외에 편의점도 없어 온천을 하고 숙소에서 조금 일찍 저녁을 해결하러 나왔다.


오후가 되자 빗발이 거세지고 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공포 게임이 시작되는 몽환적인 마을 같았다. 언덕을 올라 운젠지옥 버스 정류장 뒤로 불빛이 보여 그곳으로 들어갔다.



키쿠 | 특제짬뽕과 오무카레


차분한 분위기의 여사님이 맞이해 주신다. 딱 이거다 하는 메뉴는 없지만 나가사키현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지역 메뉴와 푸짐한 양이 좋다. 가격이 대부분 천 엔 미만으로 저렴해 가성비가 좋다.


IMG_2610.jpeg 키쿠 입구


특제짬뽕은 나가사키에서 먹었던 바로 그 짬뽕이다. 여기에 특제라는 명칭이 붙을 만큼 양이 많았다. 뜨끈하고 개운한 국물에 어묵, 해물이 푸짐하고 맨 위에 달걀노른자가 올라가 있다. 달걀노른자를 톡 터트려 먹으면 짭짤한 국물에 고소함이 더해진다.


IMG_2605.jpeg 특제짬뽕


거대한 접시에 카레 오므라이스가 나왔다. 약간 매콤한 카레와 케첩을 넣고 볶은밥의 조화가 좋다. 양이 넉넉해 둘이 헉헉 거리며 먹었다. 점심에 먹은 소바가 맛은 훌륭했지만 양이 적은 탓에 금방 소화가 돼버린 오변은 이제야 좀 먹은 거 같네 라며 기분 좋아했다.


IMG_2609.jpeg 오무카레

운젠은 버스 시간이 많지 않아 일단 들어오면 하루는 지내야 된다. 다른 지옥에 비해 관광지화가 덜 되어 있어 오히려 좋았다. 고즈넉한 시골길에 향긋한 풀내음과 좋은 물,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이 있어 휴식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https://mylaw.kr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