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필기구에 집착하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타쿠 수준도 아니고요. 사실 비싼 필기구에 쓸 돈도 별로 없어서 싸구려를 주로 사용합니다. 심지어 소장용 필기구는 단 한 자루도 없습니다. 전부 실제로 사용하는 것들이죠. 만년필로 필기를 하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용하지 않는 100만 원대 만년필보다 오래 사용해서 길들여진 1만 원 대 만년필이 더 필기감이 좋습니다. 그저 종이에 표시를 하는 도구에 큰돈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보니 요즘에는 손 필기를 잘하지 않더군요. 손 필기도 대개 애플펜슬 같은 걸로 합니다. 물론 아이패드를 사용하는 저도 애플펜슬까지는 아니더라도 짭플펜슬을 사용합니다만, 종이에 필기를 더 많이 합니다.
저는 정말 수많은 전자기기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변호사 일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많은 제품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많은 제품을 사용합니다. 기본적으로 제 책상에는 5개의 디스플레이가 펼쳐져 있습니다. 32인치 주모니터와 27인치 보조모니터는 주로 맥에 연결되어 있지만 HDMI분배기를 달아 윈도 PC와도 오고 가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윈도 노트북이 있습니다. 주모니터 아래에 아이패드가 있고 그 옆으로 아이폰이 있습니다. 애플 생태계에 너무 익숙해져 포기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윈도를 꼭 써야 하기 때문에 둘 다 쓰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글클라우드도 쓰고 아이클라우드도 씁니다. 물론 카카오톡 톡서랍도 사용합니다. 모두 업무에 필요합니다.
저희는 종이가 없는 사무실이어서 1년 넘게 프린터 잉크를 교환하지 않았습니다. 의뢰인과도 카톡이나 메일로 서류를 주고받을 때가 대부분이고 종이 문서로 받는다고 해도 스캔해서 바로 돌려드립니다. 서류에 하는 메모 역시 파일에 직접 주석을 달지 종이로 인쇄하지 않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도 전 왜 굳이 종이 필기를 많이 하고 있을까요?
이유는 디지털 환경보다 종이가 더 빠르고 사각거리는 느낌이 좋고, 마구 낙서하기도 좋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정관리를 앱으로 하고는 있습니다만 세부적으론 는 여전히 다이어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종이로 된 프랭클린플래너보다 더 효율적인 시간관리 도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종이를 넘기는 시간에 비해 앱을 구동하여 찾는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립니다.
이런저런 생각 정리나 낙서, 상담하면서 하는 필기 등도 모두 종이를 사용합니다. 여러 가지 앱을 사용해 보았으나 종이만큼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는 도구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 수많은 종이 제품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필기구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플래너를 만년필로 작성하면 잉크가 뒷면까지 번져서 지저분해집니다. 물론 만년필 사용에 적합한 플래너가 나오고 있습니다만, 마음에 드는 제품도 없고 만년필용 종이는 밀도가 높아서 무겁습니다. 제가 플래너에 사용하는 필기구는 지브라 사라사 제품군입니다. 그중에서도 0.5mm를 사용합니다.
사라사 젤펜은 필기감이 굉장히 부드러우면서도 번짐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적당한 긁힘이 있어서 손맛도 괜찮습니다. 여러 가지 굵기를 사용해 보았는데 0.5mm가 다이어리용으로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필기감은 0.7mm가 더 좋기는 한데 작은 글씨를 쓰기 어렵습니다.
낙서용이나 상담용으로는 라미 알스타 만년필 EF촉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라미 제품은 역시 M촉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한글 필기에는 너무 굵고 잉크 잡아먹는 귀신입니다. 상담용으로는 옥스퍼드에서 나오는 노란색 리걸패드를 쓰고 있고 막 쓰는 용도로는 역시 옥스퍼드의 밀크 연습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종이가 만년필 필기에 적당합니다.
손님용 펜으로는 금속제 지브라 사라사 제품에 0.7mm 심을 끼워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름, 주소 정도를 쓰는 용도입니다. 처음에는 만년필을 드렸으나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당황해하시는 것을 보고 그냥 볼펜으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제트스트림과 같이 유성펜을 사용하였더니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너무 종이에서 굴러다니기 때문에 손글씨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사용하면 글자가 지저분해집니다. 그래서 젤펜이 가장 적당한 것 같은데 플라스틱은 좀 없어 보이니까 금속제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제품도 기껏해야 만 원 정도입니다.
사라사는 그냥 사라사 클립도 있지만 사라사 스터디라는 제품도 있습니다. 저는 사라사 스터디를 더 좋아합니다. 일단 손에 닿는 고무(사실은 말랑한 플라스틱)가 반투명한 디자인이고 심에 눈금이 있어서 얼마나 썼는지를 계량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연습장에 공부용으로는 빠이롯트 카쿠노 만년필 F촉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 만년필에서 EF촉은 너무 가늘어서 싫어합니다. 저는 공부할 때 일본어나 중국어 등 한자를 쓸 일이 많은데 라미와 같은 유럽산 만년필은 너무 두껍고 부들거려서 한자를 쓰기가 불편합니다. 한자를 쓸 때는 적당히 긁힘도 있어야 하고 가늘어야 합니다.
수험용으로는 제트스트림 0.7mm를 선호하긴 했습니다만, 제트스트림은 속필에는 좋지만 유성펜 특성상 글자가 지저분해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도 시험을 볼 때에는 워낙 빠른 필기가 필요해서 제트스트림을 썼습니다. 다만 펜대에 멋을 낸다고 고무 부분을 이상하게 성형을 해 놔서 사라사 펜대에 제트스트림 심만 넣어서 사용했습니다.
예전에는 교재에 직접 기화펜을 쓰기도 했지만, 펜 자체의 만듦새가 너무 좋지 않아 종이를 너무 긁어버리고 잉크의 흐름도 좋지 않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서 잘 안 쓰고 있습니다.
외국어 교재는 반들반들한 종이를 쓸 때가 많습니다. 그런 종이에 필기를 할 때에는 사라사 젤펜도 괜찮고 제트스트림 같은 유성펜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체형광펜은 잘 되지 않고 뭉쳐질 때가 많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액체 형광펜을 사용해야 합니다. 국내 M사의 어머어마하게 싼 액체 형광펜은 안료가 고르게 나오지 않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종이에 대었을 때에는 잉크가 너무 진하게 나와서 번지기도 합니다. 역시 스태들러 트리플러스만한 제품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플래너에는 액체 형광펜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종이가 얇아서 뒷면으로 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체형광펜을 사용하게 되는데 저는 스태들러 제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국내 생산인데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뚜껑하고 심을 돌려서 빼는 부분이 헛갈리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뚜껑인 줄 알고 자꾸 뽑게 되는데 조만간 망가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필기감은 굉장히 좋습니다만 역시 고체형광펜 특성상 반질반질한 종이에서는 뭉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샤프는 펜텔 비쿠냐와 삼각형 모양의 스태들러 제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샤프는 스태들러 제품이 많이 별로입니다. 연필은 좋은데 말이죠. 펜텔 비쿠냐 샤프는 1000원대 제품으로 요즘 잘 안 파는 것 같은데 저도 사용한 지 10년도 넘었습니다. 말랑말랑한 플라스틱 재질인데 쿠션감도 살짝 있어서 손에 착 달라붙습니다.
인터넷에서 샤프 추천 글을 보면 심 리드가 길쭉하게 나온 '제도용' 샤프를 비교한 글이 많이 보입니다. 제도용 샤프는 말 그래도 제도용입니다. 자를 대고 그을 때 눈금을 가리지 않기 위해 고안된 제품들입니다. 그런 제품들은 필기감도 좋지 않고 필기할 때 샤프심이 잘 부러집니다. 글자를 쓰라고 만든 게 아니니까 당연합니다.
제가 1000원대 제품을 계속 사용하는 이유는, 사실 샤프 자체를 잘 안 쓰기 때문입니다. 샤프의 필기감을 샤프심이 좌우할 때가 많은데, 마음에 드는 샤프심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좀 굵고 무른 제품을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만년필용 잉크는 다양한 색을 사용합니다만, 역시 검은색, 블루블랙, 붉은 계열의 색을 주로 사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카본이 들어간 중국산 잉크를 사용해 봤는데 검은색의 농도가 꽤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요즘엔 손필기를 문서작성에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낙서나 서명용이니까 사실 색은 크게 상관없는데 블랙보다는 블루블랙이 더 눈에 잘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항상 사용하는 제품은 지금 세어보니까 12자루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지우개와 수정테이프까지 보관해야 하니까 가뜩이나 커다란 필통이 항상 빵빵합니다. 이제는 필통을 좀 바꾸고 싶은데... 필통을 바꾸면 그에 맞춰서 필기구를 더 사들이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