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손글씨를 많이 씁니다.
꼭 손글씨를 써야 할 필요는 없지만 컴퓨터나 패드보다 손으로 직접 썼을 때 정리가 더 잘되는 것도 있고, 그냥 느낌이 좋기도 합니다. 손글씨는 느리니까 느린 만큼 생각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도 합니다.
저는 필기구에 어마어마하게 돈을 쓰는 편은 아닙니다. 그럴 돈도 없고요. 저는 그저 평범하게 문구점에서 누구나 가볍게 살 수 있는 것 위주로 용도에 맞게 오로지 실용적인 이유로 필기구를 몇 개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연필과 샤프는 용도가 다르고 수성펜과, 유성펜, 젤펜은 용도가 다릅니다. 형광펜도 액체와 고체는 용도가 다르지요. 물론 샤프 역시 통통한 것과 빼빼한 것의 용도가 다릅니다.
이 글에서는 제가 쓰고 있는 겨우 네 자루의 저렴이들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는 것들이지요. 제일 비싼 라미 알스타조차 겨우 몇만 원이면 삽니다. 같은 저렴이들이지만 얘네들이 느낌이 너무 달라서 나름대로의 매력이 다 있습니다. 그 느낌에 대해 지극히 주관적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아참, 저는 4개 언어를 사용합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사용빈도로 따지면 한국어>일본어>영어>중국어 순이고, 익숙한 것으로 따지면 한국어>중국어>일본어>영어 순이겠네요.
각 언어에서 사용하는 문자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영어 로마자는 다들 아시다시피 둥글둥글이 많고 자획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중국어나 일본어에서는 한자를 사용하는데, 나라마다 사용하는 한자는 서로 다릅니다. 자획이 복잡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습니다. 한자의 획이 많은 순으로 따지면 대만>일본>중국 순인 것 같습니다.
일본어는 히라가나는 둥글둥글인데 한자가 많습니다. 한국어에서 쓰는 한글은 획이 한자만큼 많지는 않지만 히라가나보다는 많고 영어와 같이 동그라미도 많이 씁니다.
동글동글이 많은 순으로 따지면, 영어>한국어>일본어>중국어일 것 같고, 글자의 복잡한 정도를 따지면 중국어(대만)>일본어>중국어(중국)>한국어>영어 순인 것 같습니다.
이런 문자별 특징에 따라 만년필의 느낌이 다릅니다.
영어를 쓸 때는 획이 굵더라도 부들부들한 게 좋고, 한자가 많은 언어를 쓸 때는 촉이 가는 것이 좋습니다. 촉이 굵으면 점이나 삐침 표현이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유럽이나 미국에서 생산되는 만년필은 굵은 촉을 주로 쓰고 일본이나 중국에서 생산되는 만년필은 촉이 가늡니다. 한국어는 이제는 거의 한글만을 쓰고 한자는 거의 쓰지 않기 때문에 일본어나 중국어 사용자에 비해 굵은 촉을 사용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만년필 사용자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유명하다 싶은 제품이 없습니다.
저는 라미 알스타를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구입했고 사파리는 막 쓰는 용도로 필요해서 국내에서 하나 구입했습니다. 닙이 서로 똑같이서 갈아 끼워도 되고, 캡이든 뭐든 다 재질만 다르고 크기는 똑같습니다. 알스타는 플라스틱이 좀 더 메탈느낌이고 사파리는 더 싸구려 느낌입니다.
무게는 알스타가 아주 약간 더 무겁습니다만, 잉크의 무게만큼의 차이도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라미 제품의 특징은 유럽식이라 촉이 아주 두껍습니다. 잉크도 엄청 먹습니다. 그래서 부들부들합니다. 종이 위에서 거침이 없습니다. 만년필을 길들일 필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부드럽고 쓰다 보면 더 부드럽습니다.
라미 제품은 영어나 한국어를 휘갈겨 쓸 때 적합합니다. 한자가 많은 일본어나 중국어를 쓸 때에는 닙이 두꺼워서 글자를 크게 써야 합니다. 획이 뭉개지니까 속필에는 좋지만 작은 글씨는 이쁘게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상담할 때에 알스타를 사용하는데, 설명을 하면서 빨리빨리 쓸 때 굉장히 좋습니다.
그립이 완전한 삼각형은 아니고 엄지와 검지만 평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지에 닳는 부분은 원형이라서 꽤 거슬립니다.
만년필은 연필이나 볼펜과 달리 쓰는 방향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펜을 쥘 때 검지 손가락을 위로 향하게 쥐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삼각형 그립이 불편하고 원형 그립이 편한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검지를 위로 잡으면 손목이 꺾이기 때문에 장시간 필기를 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엄지와 검지를 서로 옆으로 맞대어 중지와 함께 삼각형을 만드는 식으로 펜을 쥐는 데, 이렇게 쥘 때에는 삼각형 그립이 가장 편합니다.
라미 알스타와 사파리가 삼각형 비슷하게 한 것은 좋은데 왜 중지에 닿는 부분을 원형으로 처리했을까요. 좀 아쉽습니다.
라미 알스타, 사파리는 캡을 뒤에 꼽지 않고 사용하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캡에 금속재질 클립이 달려 있는데 캡을 뒤에 꽂아버리면 무게중심이 뒤로 쏠립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처럼 클립을 몸 쪽으로 해서 꼽는 식으로 무게 중심을 바꿀 수 있습니다만, 그래도 펜이 무거워집니다.
Hongdian은 중국어 한글 표기법 상 '훙뎬'으로 표기해야 하지만 다들 '홍디안'이라고 표기합니다. 훙뎬이라고 검색하여도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제조사에는 다들 관심이 없나 봅니다.
훙뎬 포레스트 제품이 아마존에서 가성비 제품으로 인기라길래 호기심에 사 봤습니다.
전체적으로 메탈 재질이라 굉장히 무겁고 바디가 가늡니다. 매우 저렴하지만 안 저렴해 보입니다. 캡을 열 때 초콜릿을 부러뜨리는 것 같은 고급스러운 느낌이 납니다. 플라스틱으로는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느낌입니다.
무게감 때문에 필기를 할 때 종이에 미끄러지는 느낌이 좋아서 버터느낌이 납니다.
그런데 몇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일단 캡을 뒤에 꼽게 설계가 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쓰면 너무 무겁고 밸런스도 맞지 않습니다. 그립이 너무 짧아서 한글을 쓸 때처럼 정자세로 잡으면 펜이 종이에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펜을 굉장히 세워서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펜을 세워서 잡으면 종이가 긁히고 잉크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워서 잡으면 쓰는 느낌이 별로고 정자세로 잡으면 그립이 아니라 바디를 잡아야 합니다. 그립도 너무 가늡니다.
위의 사진은 훙뎬 포레스트와 라비 알스타를 같이 놓고 찍은 것입니다. 훙뎬 포레스트가 대충 1/3 이상 그립이 짧습니다.
이 만년필을 설계한 사람을 그립을 굉장히 짧게 잡는 습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립을 짧게 잡으면 펜을 세워야 하고, 펜을 세우면 힘이 많이 들어갑니다. 힘이 많이 들어가면 필기감이 무척 떨어질 뿐만 아니라 종이를 너무 긁게 됩니다. 또 그립과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 사이의 각이 좁아져서 손이 불편해집니다.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엄지와 검지가 아니라 검지와 중지, 혹은 약지와 새끼로 펜을 잡습니다.
어떻게 펜을 잡든 글씨만 잘 쓰면 됩니다만, 인류가 수 천년 간 펜을 잡으면서 엄지와 검지를 사용했던 것은 그것이 손목에 부담을 가장 덜 주면서 펜을 잘 컨트롤할 수 있고 손에 잉크를 묻히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훔뎬 포레스트를 쓸 때 저는 캡을 빼서 쓰는데 그래도 무게 중심이 전체적으로 위쪽에 있습니다. 펜이 종이에 붙지 않고 종이에서 달아나려고 합니다. 이걸 교정하는 것은 굉장히 쉽습니다. 그냥 그립을 다른 펜들처럼 늘리면 됩니다. 아마 설계하는 사람의 잘못된 습관 때문에 펜이 잘못 설계된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불편해서 이 펜은 잘 안 씁니다. 겉멋용이라고 할까요.
예전에 계약을 하면서 별생각 없이 의뢰인께 제가 쓰던 라미 알스타를 건넸다가 닙 하나를 해 먹은 적이 있어서, 요즘엔 이 펜을 건넵니다. 사람들이 싼 줄 잘 모릅니다. 게다가 망가져도 별 아까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안 쓰니까요.
파이롯토 가쿠노는 그냥 귀여워서 샀습니다. 닙이 윙크를 하고 있어 아주 귀엽습니다. 일본어 한글 표기법 상 '파이롯토 가쿠노'라고 표기해야 합니다. (한국법인의 명칭은 파이롯트이긴 합니다. 그런데 U에 움라우트가 붙었으니 사실은 '카퀴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쿠노는 굉장히 가볍고 그립도 괜찮습니다. 그립이 완전한 삼각형은 아닌데 라미 알스타, 사파리와 달리 중지 부분도 편평합니다. 두께도 적당해서 필기가 편합니다. 다만 재질의 싼 느낌은 어쩔 수 없네요. 만원도 안 되는 제품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가쿠노는 닙이 굉장히 딱딱한 느낌입니다. 다들 금속 닙이니까 뭔 차이가 있겠나 싶겠지만 종이와 마찰이 좀 있습니다. 종이가 찢기는 느낌이랄까요. 느낌만 그렇지 실제로 잉크흐름이 그 정도로 나쁘지 않습니다. 뭐랄까 아직 날을 세우지 않은 식칼 느낌이랄까요. 과도에 가깝겠네요.
과도로도 채소와 과일을 자를 수는 있지만 뭔가 불편하고 잘 안 되잖아요. 딱 그런 느낌입니다. 귀엽긴 한데 뻑뻑합니다. 그러니 길들이기 전까지는 손이 피곤합니다.
하지만 마찰이 센 만큼 라미 제품보다는 글자는 이쁘게 잘 써집니다. F촉이 라미 EF촉보다 더 얇기 때문에 한자를 쓰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라미보다는 날카로워서 잘 써집니다만, 휘갈겨 쓰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가쿠노는 캡도 좀 뻑뻑합니다. 꺼낼 때 힘이 많이 들어갑니다.
펜 길이도 약간 짧습니다. 미니는 아니지만 귀여움을 극대화하려고 짧둥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최애를 꼽자면, 역시 라미 알스타입니다. 돈 만 원이라도 비싼 건 비싼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종이에 금속을 긁는데 왜 부들부들한 것일까요. 역시 전범국 기술력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