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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Oct 08. 2024

음악소설집을 읽다가

Feat 한국어 선생님 시점

요즘 흥미로운 작업을 하고 있다.


과거에 내가 쓰지 않던 형태의 글을 써 보고 있는데 조금 어렵고 조금 설렌다. 가끔은 쓰는 게 이렇게 어려워진다면 이건 즐겁지 않은데, 나는 원래 즐거워서 쓰기 시작한 사람인데, 이러다가 어느 순간 그만두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쓰지 않는 것보다는 어려운 글을 쓰는 게, 잘 써지지 않는 글을 쓰는 게 내 인생의 즐거움 잣대에서는 비교 우위에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좀 더 써 보기로 했다.


나는 과거를 어떤 한 장면으로 기억하고, 책을 어떤 한 문장으로 기억한다. 그러므로 내게는 하나의 장면이 한 사람과의 관계의 전부이고 한 문장이 한 책의 전부이다. 아주 편협하고 아주 감각적이다. 성급한 일반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책을 읽을 때 그런, 눈이 멈춰지는 문장에 인덱스를 달고서는, 책을 다 읽은 후에 그리고 서가에 꽂아 놓은 후에 종종 그 부분만 다시 읽어본다. 그럼 금세 한 권의 책을 다 읽은 듯이 그때의 시간과 공간이 떠오른다. 내가 책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나는 "한국말로 '안녕'은 안녕"이라고,
"다만 우리말의 안녕에는 '반갑다'는 뜻과 '잘 가'라는 의미가 둘 다 담겨 있다."라고 했다.

김애란 <안녕이라 그랬어> 12쪽


외국인 학생들은 그렇게나 '안녕히 가세요'와 '안녕히 계세요'를 헷갈린다. 이런 식이다. 교실을 떠나는 학생이 교실에 남은 나에게 정중히 허리 굽혀 인사한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또는 식당을 떠나는 나는 아직 밥을 먹고 있는 학생에게 정중한 인사를 듣는다. '안녕히 계세요'라는. 기본적으로 한국어의 '오다'와 '가다'의 개념이 영어와 달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잘 가'의 안녕과 '반가워'의 안녕이 같은 말이어서 그렇기도 하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지점을 발견하게 됐다. 웰컴과 굿바이가 같은 단어였다. 이것 참, 이렇게 난감할 때가.


10년 가까이 한국어를 가르치면서도, 이런 새로운 지점을 발견한다. 특히 책을 읽을 때, 대화체를 읽을 때, 나는 '이런 맥락에서 이런 말을 하는구나' 깨달으면서 한국어 다시 보기를 한다. 그리고 이렇게나 잘 모르는 내가, 이제 어느 급이건 부담 없이 들어가서 수업을 하게 된 것이 문득 부담스럽다. 저경력 강사 때에는, 한 번도 가르쳐보지 않은 레벨의 수업을 하는 것이 그렇게나 부담스러웠다. 원어민 강사이면서, 이른바 네이티브 스피커이면서도 한국어를 한국어로 가르치는 게 부담스러운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부담스럽지 않다. 플로우만 이해하고 머릿속에 설계하고 들어가면, 처음에 좀 헤맬 수 있겠지만 즐겁게 수업을 끝내고 나온다. 하지만 개운하지는 않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그러곤 화면 속 슬라이드 교재로 눈을 돌리며 노련하게 화제를 바꿨다.

-같은 책, 23쪽


나는 제법 노련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숙련된 노련함이 아니라, 그냥 익숙해진 것이어서 알맹이는 의심이 가는 그런 상태. 


음악소설집에 나오는 김애란 작가의 단편 <안녕이라 그랬어>는, 코로나 시절 온라인으로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는 이야기다. 그래서 언어를 배우는 것이 주된 스토리다. 주인공은 영어 강사에게 약간, 어떠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코로나 시절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고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여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언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고 미묘해서, 한국어 교실에는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어떤 공기가 흐른다. 아마 모든 외국어 교실이 그럴 텐데, 그걸 김애란 작가가 이렇게 설명해 줬다.


감정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사실 대상과 무관하게 외국어 수업에는 어느 정도 성애적인 측면이 있었다. 일말의 더듬거림과 망설임, 지연과 기쁨, 찰나의 교감, 수치심과 답답함, 긴장과 해소,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 실수와 용서 등이 그랬다. 나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같은 책, 25쪽


나는 이 단락을 완전하게 이해한다. 외국어 수업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그래서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살짝 들뜨게 된다. 긴장이라 해도 좋고 설렘이라 해도 좋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 가끔 고단하지만, 나는 부지불식간에 다시 들뜨고 다시 기뻐진다. 그래서 내가 이 일을 이렇게 오래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하고 싶다고 생각하나 보다. 10년은 긴 시간이다. 그리고 하나의 일만 십 년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십 년이나 했는데 아직도 더 하고 싶다. 아직,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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