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gnes Nov 29. 2021

문맹에 대하여

내 시어머니는 문맹(文盲), 무학(無學)이다.


14년 전 내가 현금 예단으로 5백만 원짜리 수표를 들고 갔을 때

어머니의 첫 말은 "애기야, 이게 얼마냐?"였다.


글을 모르신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글 안에 숫자도 포함되는 것은 몰랐다.


어머니는 숫자와 글자를 이미지로 기억하신다.

한글도, 숫자도 모르지만

만원, 오천 원, 천 원 돈은 아신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도 타신다.

마을버스도 타시고 시내버스도 타신다.

물론 휴대폰 단축키도 누르실 줄 아신다.

이 모든 게 가능하다.


이미지가 복잡한 숫자는 순전히 기억에 의존하신다.

매 월 통장 정리를 하시고

얼마쯤 남아있는지 머리로 외신다.

그리고 나에게는 '지금 얼마가 남아있지?'라고 꼭 확인을 하신다.

더블 체크.


언젠가 필리핀에 놀러 갔을 때

생소한 언어로 뒤덮인 시내 중심가에서 공황에 빠진 적이 있다.

그때까지 내가 가 본 외국이란

한자가 있거나 영어가 있는 곳들이었다.

그런데 필리핀 그 마을에는

모든 간판에 내가 아는 언어가 하나도 없었다.

그냥 모두가 그림처럼 보였다.

그때 처음 문맹인 사람들은 이런 심정이겠구나, 생각했다.


어머니의 눈에 세상이란, 이런 것이겠구나.

내 시어머니는 참 용감하게 인생을 사셨구나.


내 언니는 문해교육 종사자다.

나는 한국어 교육 종사자다.


하지만 내 시어머니는 문맹이다.



어머니 나이 89세의 이야기

이전 16화 늬들 힘들게 번 돈이잖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