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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Apr 24. 2023

늬들 힘들게 번 돈이잖어

늬들 힘들게 번 돈이잖어.
그런 돈 쓰고 가는 게 싫여. 엄마한테 오면 밥값에 차비에 돈 들잖여.
그러니까 오지 말어.


올해 91세가 되신 어머니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다. "늬들 힘들게 번 돈이잖어". 나를 어머니에게 스며들게 것은, 이렇게 짧지만 깊은 마디의 말들이었다.


갓 결혼한 언젠가 회사 근처 백화점에 들렀다. 마침 우리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시조카가 지하 식당가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간식거리를 사서 갔다. 나이도 비슷하고, 결혼식 때 이런저런 잔 심부름도 해 줬고, 웨딩카 운전도 해 줬고, 남자 조카가 아주 살가웠던 기억이 난다. 요리를 아주 잘했던 조카는, 백화점에서 일정 기간 배워 나가 자기 식당을 차리겠다는 야심 찬 꿈이 있었다. 우리는 불과 네댓 살 어린 조카의 꿈을 기특해하며, 건실한 청년이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조카가 일하는 매장에 도착했다.


거기는 철판볶음밥 전문점이었다. 한 여름이었고, 손님들이 앉는 곳은 시원했지만 부엌은 보기만 해도 더웠다. 땀을 뻘뻘 흘려 벌게진 얼굴로 내가 사간 간식거리를 반갑게 받아 드는 그를 보며, 직업에 귀천이 없다 했지만 돈은 같은 돈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나이 어린 숙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 모르는 조카는, 직원 할인을 받을 수 있으니 여성 매장에 가 삼촌에게 옷 한 벌 사달라 하라며 해맑은 농담도 던졌는데, 나는 받아치기가 어려웠다.


나는 한 번도, 몸으로 일해 본 적이 없다. 대학 졸업 후 20년 가까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내근직이었다. 내 노동이 고되지 않다 생각한 적은 없지만, 뙤약볕이나 얼음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항상 생각했다. 그러므로 나의 노동은 그들에 비하면 가볍다고, 그러니 감사할 일이라고 예전에도 생각했고 지금도 생각한다.


하지만 나와 가까운 이들이, 가족들이, 나의 노동에 '편하게 일한다' 또는 '고상하게 일한다' 말하며 나의 노동을 다른 이들의 노동 보다 아래에 둘 때, 나는 좀 억울하다. 비록 실내에서 일하고 그래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더라도, 나에겐 내가 일하는 그곳이 뜨거운 철판 앞이고 차가운 얼음골이다. 다만 우리는 각자의 일터에서 종류가 다른 고난을 겪어 낸다.


하지만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너무 힘들어요."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 특히 먼 가족들에게는, 1년에 한 번 두 번 만나는 사이에 나눌 말이 아니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종종 내게 그런 말을 하신다. "늬들 힘들게 번 돈이잖어."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는 나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매우 생경했다. 나조차 돈 벌 때 마음과 돈 쓸 때 마음이 달라서, '내가 이 돈을 어떻게 벌었는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비싸다 싸다, 아깝다 아깝지 않다, 그렇게 가성비를 따진 적은 있지만.


 "늬들 힘들게 번 돈이잖어" 그 말을 할 때 어머니의 얼굴은 또 어떤지. 아주 애가 닳는 표정이시다. 처음 어머니께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사실 눈물도 살짝 났다. 다른 모든 노동이 그러한 것처럼 내 노동도 힘들다는 걸, 어머니께서는 아시는구나. 나도 어머니께는 그런 존재구나. 

봐라 나도, 이런 어머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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