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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May 30. 2022

아이구, 이쁜 것

어머니의 작고 작은 무릎에 누워버렸다

어머니 나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소통이 매우 간결해지고 단순해지는 것을 느낀다.


많은 말이 긴 시간 오고 갔지만 결국 헤어질 때 보면 처음에 고집하신 그 의견만을 되풀이하실 때. 저녁 상에 이것저것 많은 반찬이 올라왔지만, 고기를 사 온 막내아들에게 "애비야, 고기 사와 줘서 고맙다. 먹었다."라고 '고기 사온 사람'만 기억하실 때. 어머니는 왜 듣고 싶은 것만 들으시는 걸까, 보청기를 안 끼시는 이유는 본인 말만 하시고 남의 말은 안 듣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속상했던 적도 많다.


남편은 열두 살에 어머니와 헤어져 서울로 보내졌다. 열두 살이라니. 아직은 아기였을 열두 살의 남편은 그때부터 쭉 누나네 집에서 살았다. 누나의 남편과 누나의 아들과 함께. 그래서 너무 죄송하지만 남편은 사실, 어머니와 데면데면하다. 누나가 잘 살펴주었지만, 그래도 열두 살은 엄마 없이 자라기에는 아주 힘든 나이었을 거고, 그래서 남편은 아주 어릴 적부터 '세상은 혼자'라 여겼다. 남편을 옆에서 살펴보면, 뼛속까지 배어있는 독립적인 그 무언가가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시어머니를 일흔다섯에 처음 만났다. 뭔가 교감을 나누기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고, 실제로 어머니 큰 손녀와 나는 몇 살 차이가 나지를 않는다. 그렇게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늙어갔고, 나는 하루가 다르게 바빠져만 갔다. 우리는 적게는 일 년에 2~3번, 많게는 일 년에 4~5번 만났다.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어머니와 나는 정이들 시간이 없었다는 거다.


그런데도 나는 심하게 어머니를 애달파한다. 어머니가 한 살 두 살 나이 드시는 게 참 서글프고, 돌아가시면 어쩌나 걱정도 많다. 얼마나 걱정을 해 대던지, 나이 많은 시누이들이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나이 먹으면 다 그런 거라고. 너무 속 끓이지 말라고. 노을 지는 저녁이면, 어머니 혼자 불 꺼진 방에 혼자서 우두커니. 비가 오는 날이면, 무더운 여름이면, 갑자기 눈이 오는 겨울이면,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어머니의 고독이 마음 아프다. 이건 분명 정은 아닌데,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더더욱 아닌데, 이건 뭘까. 혼자 결론짓기로 이건 측은지심이구나. 죽마고우와 이야기하기로 나이 든 사람에 대한 연민이구나. 책에서 읽고 머리로 이해한 내 이성의 산물이구나. 나의 감정은 그거구나, 결론짓고 나니 한편 죄스러워졌다.


"사람 감정이 이건 연민 존경 사랑 이렇게 딱딱 끊어져요?
"난 안 그렇던데 한 덩어리로 있던데 나 태훈 씨 존경해요 연민도 하고 사랑도 해요~ 다 해요"        

[출처] 나의 해방일지 결말 해석 16회 추앙커플 시즌2 플리즈| 작성자 블랑부케


그런데 어제, <나의 해방 일지>라는 드라마에서 이 대사를 듣고, 조금 홀가분해졌다. 사람 감정이 이건 효, 이건 사랑, 이건 연민, 이건 측은지심 이렇게 딱딱 끊어지지 않는 게 맞는구나! 나는 내 90세 시어머니를 사랑도 하고 존경도 하고 불쌍해도 하는구나. 틀린 게 아니었어. 나의 감정을 이렇게 설명해준 드라마 작가님께 진정 감사하다.




지난 주말에도 어김없이 어머니와 나는, 우리의 무대에서, 발단-전개-위기-절정을 거치고, 늘 그렇듯 훈훈한 엔딩을 이끌어냈다. 왜 이렇게 싫단 말을 자꾸 하냐고 성을 내셨다. 우리가 준비해 간 음식들이야 정 싫으시다면 다시 싸올 수 있지만, 시누이들이 바로 어제 해다 준 반찬들을 홀랑 내가 다 가져올 순 없어서 절정이 좀 길었더니, 싫단 소리 듣기 싫다며 성을 내셨다. 에라 모르겠다, 지친 나는 어머니 무릎에 누워버렸다. 작고 작은 어머니 무릎에. 정말 힘들었고, 마침 어머니 무릎이 거기 있길래 누워보고 싶기도 했었다. 바로 그때, 방금까지 소리 지르시던 어머니가 내 볼을 쓰다듬으며 볼에 뽀뽀를 하셨다. "아이구, 이쁜 것." "그래, 누워서 좀 자다가 가." 아마 어머니는 또, 이것만 기억하실 거다. 오늘의 실랑이와 오늘의 이야기들은 싹 다 잊고, 마지막에 며느리 볼에 뽀뽀할 때 느꼈던 그 기쁨. 그것만 기억하실 거다. 그리고 나 또한 그것만 기억날 거다. 비록, 오늘 처음으로 '염병한다'는 새로운 욕을 어머니께 들었지만.


*염병하다 : 염병을 앓다.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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