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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Sep 03. 2022

90세 어머니의 말들

feat 유유 출판사 말들 시리즈

유유 출판사의 '말들 시리즈'를 읽은 지 꽤 오래됐다. 처음 읽은 책은 은유 작가님의 <쓰기의 말들> 어쩜 이렇게 잘 쓸까, 감탄하며 책 곳곳에 표시하고 밑줄 긋고 다시 읽고 그러면서 읽었다. 다음으로 읽은 책은 <읽기의 말들>. <읽기의 말들>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읽으면서 이 책은 빌려 읽을 책이 아니라 사서 가져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최근 전자책으로 읽게 된 <태도의 말들><걷기의 말들>. 두 책 모두 리디 셀렉트에서 발견한 책들인데, 이 책으로 난 '프랑소아 엄'님과 '마녀 체력을 가진 편집자'님을 알게 됐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나만의 '책 세계관'이 생기는데, 내 세계관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는 정말 기쁘다.


아무튼 그래서, 내 세계관의 방식으로 내 어머니의 말들을 모아 보았다. 당장 떠오르는 몇 가지를 적어봤지만 적어도 100개까지는 어렵지 않게 리스트업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1. 그만 살고 싶어. 에이, 구찮어.


어머니와 15년 간 함께하며 많은 말들을 들었다. 사람과 시절은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몇 마디 말로 기억되기도 한다.


그만 살고 싶어. 에이, 구찮어.


빨래하기 귀찮고 밥하기 귀찮고 화장하기 귀찮은 마음. 우리가 모두 다 아는 그 귀찮음 맞다. 가끔 어머니는 놀랍도록 진솔하고 참신한 언어를 사용하신다. '귀찮아서 살기 싫다'니. 어떻게 이렇게 진정성이 있을까. 어머니는 그 말을 마치 '머리 감기 싫어', '옷 갈아입기 귀찮아' 이런 종류의 말하듯 자연스럽게 툭, 상념 없이 말하셨다.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시며, 혀를 끌끌 차시며. 순간 웃음이 났다. 아이고야. 노인들의 '빨리 죽고 싶다'는 소리는 진심이 아니라던데. '사는 게 귀찮다'는 왠지 진심 같다. 나도 그 마음을 알겠으니까.  


#2. 콜레라가 무섭다드라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고 나서, 사실 많이 무서웠다. 옴짝달싹 집 안에 갇혀, 확진자 한 명만 나오면 서울 한복판의 백화점이 문을 닫던 그때. 자세히 설명도 못 하겠는데 어머니를 뵈러 가지 못 하는 나날들이 길어지고 있었다. 3개월 만에 찾아뵌 어머니는 단정하게 마스크를 끼고 계셨다. 복지관에서 노인들에게 배부한 마스크 한 박스를 챙겨 주시며 하시는 말씀, "콜레라가 무섭다드라. 그지? 뭐 그런 돌림병이 돈다냐." 나도 모르는 새 내가 어머니께 바이러스를 옮기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어머니 손 잡기도 망설이는 나에게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 콜레라. 남편과 나는 하하호호 순간 반짝, 웃을 수 있었다.


#3. 에미야, 이게 뭐냐?


호기심은 사랑의 다른 말이라 했다.

삶에 대한 호기심들은 사랑을 의미하고, 사랑이 있는 한 어머니의 삶은 희망해도 좋을 것이다. 모든 것에 관심이 없어진다는 어머니  90에, 새로운 것을 보고 '이게 뭐냐?'라고 물으시는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얼마 전 여행으로 묵은 펜션에서 정신없이 부엌일을 하고 있었다. 문득 돌아보니 어머니께서 거실에 앉아 홈쇼핑을 보고 계셨다. 가서 드라마를 찾아 보여드리니, "그걸 누르면 돼?" "9번 아니고?" 라 물으셨다. 뭘 보시는 것 같지 않게 우두커니 앉아계시더니, 집에서처럼 7번과 9번을 누르니 안 나와서 홈쇼핑을 보고 계셨나 보다. "여기는 동네가 달라서 번호도 달라요"라고 말씀드리니 "오, 그렇구나."라고 바로 수긍하셨다.


어머니는 새로운 걸 보면 꼭 물으신다.

"에미야, 이게 뭐냐?"


한 번은 찬장에 있는 뜯지도 않은 각종 조미료들을 하나하나 꺼내시며, "이게 뭐냐?"를 반복하시고, "오 그래? 이게 간장이여? 맛소금이여?"를 하나하나 여러 번 반복하셨다. 어머니는 글을 모르시기에 뜯지 않고서는 내용물을 알 수 없는데, 다 새 거라서 알아낼 방도가 없으셨던 거다.


어머니의 말은 항상 반전이 있다. 

90세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 속 여러 슬픔과 애잔함 속에서도, 그 (참신한) 반전들이 날 항상 웃게 한다.



* 제목 <어머니의 말들>은, 유유 출판사의 <말들 시리즈>를 모방해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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