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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May 08. 2022

지랄헌다

세탁기 때문에

세탁기를 들였다. 


주 5회, 90세 어머니댁을 방문키로 한 요양보호사께서, 세탁기 없는 집을 보더니 퍽 난감해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댁에는 사실, 아직 짤순이가 있다. 텔레비전에서만 볼 수 있는, 세탁은 못하고 짜는 것만 가능한 짤순이. 아무튼 어머니는 무언가 새 물건을 집으로 들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시기 때문에, 사전 양해나 언질 없이 세탁기를 들고 업체 직원과 쳐들어갔다. 눈이 휘둥그레진 어머니께는, 아파트 단지 내 이사 가는 집에서 버리려고 내놓은 걸 주워왔다고 둘러댔다. 얼떨결에 세탁기를 받으신 어머니께서는, 곰곰 생각해 보시더니 내 거짓말을 알아채셨다. 내가 내일모레 죽을 건데 이런 걸 왜 뭐하러 돈 주고 사 왔냐며 목청껏 소리를 지르셨다.


"어머니 돌아가시면, 제가 가져다 쓸게요."

사실 이런 접근은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무리수를 두고 한 번 해 봤다.

"니가 이걸 가져다 쓴다고? 지랄 허구 있네."

이런... 어머니께서도 무리수를 두신다. 나에게 욕을 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머니께서도 말을 하고 앗차 싶으셨는지 "우습다"라고 말끝을 흐리시며 웃어 버리셨다.

어쨌든 위험을 감수하고 무리수를 둔 덕에 세탁기 사건은 일단락이 났다.


세탁기 대거리가 끝나고 난 후, 이번에는 집에 있는 온갖 식량들을 싸 주신다며 일어났다 앉았다가를 반복하셨다. 부침가루, 고구마, 조미김, 마스크까지... 집에 있는 온갖 것들을 싸 가라며 싸기 시작하셨다. 자식들이 두고 먹을 수 있게 사다 놓은 모든 것을 싸신다. 당장 오늘 점심에 먹을 반찬 하나 없는데, 쌀은 싸 주겠다 하시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다.


"어머니 자꾸 이러시면 저 이제 안 올 거예요."

앞서 무리수를 둬 성공한(?) 전적이 용기를 북돋아 주어, 다시 한번 무리수를 뒀다.

"그래. 오지 마라."

이번엔 안 통한다. 나는 얼른 꼬리를 내렸고, 어머니께서는 남편 몰래 우리 옷가방에 이것저것 야무지게 넣으신다.


실랑이를 한참 하고 나니, 온몸에 힘이 다 빠진 느낌이었다. 조금 더 기싸움을 해볼까 싶다가, 문득 그런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는 다섯 명의 딸과 이런 싸움을 얼마나 반복하실까. 그 다섯을 어머니는 종종, 이기지 못하셨을 거다. 젊었을 때랑 달리, 본인이 하고픈대로 못 하신 일들이 수두룩할 거다. 그나마 막내며느리인 내가. 어머니께서 위엄을 세울 수 있고, 세우고 싶은 마지막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어머니의 눈빛에서, '막내 너만이라도, 내 말 좀 들어주라. 이것 좀 가져가라.'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과거의-내가 결혼하던 즈음의, 70대 중반의-어머니는, 그 누구도 어머니의 뜻에 맞설 없을 만큼 강하고 강단 있었다. 그 시절의 본인이 많이, 그리우실 거다. 살아보니 청춘만 그리운 것이 아니라, 유년기만 그리운 것이 아니라, 작년도 그립고 지난달도 그립다. 아니 오히려 세월이 흘러가는 게 느껴지며 아쉬운 건 2년 전, 3년 전이 더하다. 내가 이러니 아마 어머니도 그러실 것 같다. 씩씩하게 밭일 나다녔던 70대가, 씩씩하지는 못해도 아직은 나다녔던 80대가, 그리우실 것 같다.




2021년 10월 9일 한글날에 쓴 글.


#지랄하다 #(속되게) 마구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행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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