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톡방이 고요하다.
이렇게 오랫동안 잠잠한 적이 없었는데, 너무나 별일이 없다. 아니, 주고받을 이야기가 없다. 주로 어머니 사진이 오고 갔고, 어머니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아 왔기에, 우리를 묶어 주었던 공통된 화제가 사라진 지금은 무언가 할 일을 잃은 느낌이다. 곧 5월이 오는데. 5월은 다들 번갈아 가며 어머니를 만나고 다니느라 어느 때보다 단톡방이 활발히 울렸던 달인데. 5월에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오랜만에 원주에 갔다가, 남편이 큰 시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저희 점심 좀 주세요." 안 하던 짓이었다. 이제 원주에 가도 우리는 갈 곳이 없다. 그게 요양병원이라도 갈 곳이 없어진 우리는 마냥 허전하다. 큰 시누이는 능이버섯을 넣은 삼계탕을 한 솥 끓여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당 한 마리는 먹어야 한다면서 정성으로 끓인, 강원도다운 맛과 향이 솔솔 풍기던 삼계탕. 봄 감기에 시달리던 우리는 따뜻한 삼계탕 한 사발에 몸도 마음도 풀리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삼계탕을 먹으면서, 나는 서글픈 어떤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와의 시절은 이제 끝이 났구나. 내 시어머니는 나와 처음 만날 당시부터 아주 나이가 많은 할머니였기에, 시댁이라고 가도 어머니가 나에게 뭔가 식사를 준비해 준 기억이 거의 없다. 어머니는 겨우 밥 정도를 해 놓고 기다리셨고, 우리는 우리가 사서 간 음식을 요리해 먹거나 나가서 사서 먹곤 했다. 나는 삼계탕을 먹으면서, 이제 이런 음식을 해 줄 어머니가 내게 없다는 것을 실감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이제 시누이 집에 와서 이런 좋은 시간을 가지더라도, 이건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의 그 일상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대개 우리는 큰 시누이 집에 모여서 밥을 먹으면서, 술을 마시면서,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 우리는 항상 어머니를 만나고 가는 길이거나, 어머니를 입원시키고 또는 간병하고 나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그도 아니면 우리의 차 뒷좌석에는 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언젠가 크리스마스가 낀 연휴, 어머니를 간병한 주말이었다. 지방 소도시의 종합병원에는, 구내식당도 지하 편의점도 심지어 빵집도 다 문이 닫혀 있었다. 병원 인근 상권도 고요하긴 마찬가지였다. 단 이틀인데도 우리는 보호자의 식사를 해결하기가 아주 난감했다. 겨우겨우 이틀을 보내고 올라오던 길에, 큰 시누이가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해서는 김밥을 내밀었다. 60이 훌쩍 넘은 시누이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을 동생 부부를 생각하면서 김밥을 싼 것이었다. 올라오는 차 안에서 그 김밥을 먹으면서 새삼 나는 행복을 느꼈다. 김밥이 얼마나 맛이 있던지, 남편과 나는 연신 "김밥 진짜 맛있다. 그치?
라고 반복해 말하면서 그 많은 김밥을 뚝딱 먹어 치웠다.
어머니의 안부를 주고받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고, 어머니의 무병장수를 바라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던 우리들이다. 우리는 그것 말고 다른 것으로는 대화를 시작할 줄 모른다. 우리는 어머니의 자식으로서 그렇게 어머니에게 길들여져 있다. 우리는 이제 다른 시절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