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열일곱 살 내 아이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장례식을 경험했다. 할머니의 장례식. 아이에게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 엄마 아빠뿐이다. 상복을 입은 아이는 반은 아이, 반은 어른인 상태로 난생처음인 모든 것을 경험했다. 뒤늦게 빈소에 도착한 아이 앞에는, 열 명이 넘는 수의 사촌들이 있었다. 검은색 양복과 검은색 한복을 입은 사촌형과 누나들. 처음에는 낯설어했지만 이내 적응했고 맡겨진 일들을 진지하게 정성껏 했다. 할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을 실감하지는 못했겠지만, 진지해야만 하는 어두운 분위기를 감지한 것 같았다.
마지막 날 발인 때, 아이는 제대로 죽음과 슬픔을 경험했다. 엄청난 크기의 소리로 오열하는 고모들, 그리고 본인의 엄마인 나.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렇게 슬프게 크게 우는 것을 처음 본 아이는, 많이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내 남편에게, 아빠는 왜 우는 엄마를 안 챙기고 그렇게 멀찌감치 떨어져 있냐고 나무랐다. 아이의 아빠는 본인의 슬픔을 감당하기에도 벅찼을 텐데, 아이의 눈에 그런 마음까지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한 줌 재가 되는 과정을 보면서는 또 아이답게 여러 가지 신기한 마음을 내보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어깨뼈에 박았던 철심만은, 불길 속에서 살아남아 나왔더라고, 충격적이었다고. 그런 말을 종알종알 거리며 나와 가족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위로했다.
어두운 겨울을 보냈다.
사실 나는 아직도 내 인생에서 처음 맞은 곤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봄 햇살을 느끼며 행복하다 느끼는 것도 순간이고, 뭔가 불운이 또 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나이 들어가면서 자꾸 아픈 내 가족들. 내 아이에게 이 많은 사람들을, 이제 사라질 사람들만 남겨 준 것 같아 나는 요즘 많이 마음이 안 좋다. 많은 보통 사람들이 아이에게 형제를 만들어 주는 이유도 이제는 제대로 알 것 같다. 다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 키우기도 힘든 세상에 자식에게 형제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부채감을 갖는 이유가. 나는 그걸 진짜 몰랐다.
봄에 접어들 무렵. 성당에서 음악제를 했다. 어두운 겨울을 보내는 중인 부모를 대신해, 아이는 성당에 다니면서 긴 겨울을 보냈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타이트한 스케줄 사이로 짬짬이 시간을 내어 연습을 다니고 모임을 가지더니, 중고등부 음악제를 한다면서 티켓을 가져왔다. 그런 티켓을 처음 받아 본 나는 두근두근한 마음과 꽃을 안고 성당에 들어섰다. 한 시간 남짓 아이들은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연극을 했다. 아이가 된 듯 신나서 노래하고 춤추는 교사들과 신부님, 수녀님들을 보는 것도 매우 즐거웠다. 그들은 진짜 하나의 따뜻한 공동체였다. 바로 이 분들이 슬픈 부모를 대신해, 내 아이의 겨울에 함께 해 주었구나. 나는 마음이 따뜻해졌고 아이가 대견했다. 이곳에서 내 아이는 자기 나이에 맞는 시절을 보냈구나. 그랬구나.
그리고 자기만 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엄마와 아빠를 웃게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어느 날 이런 말을 한다. 남자 고등학생 여덟 명이 삼겹살 무한리필 식당에 갔는데, 너무 많이 먹어서 아무래도 사장님께 쫓겨 날 것 같다고. 또 어느 날은 이런 말을 한다. 방학 끝나고 학교에 갔더니, 자기보다 작던 애들이 훌쩍 커져서 왔다고. 인스타에 자주 보이는 키 크는 약 좀 사 달라고. 아니면 성장판 좀 찍어 보게 병원에 가 보자고.
아이는 잘 크고 있다. 쉬지 않고, 달리듯이. 아주 잘, 크고 있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