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아무데나 한군데만이라도 붙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수능 결과를 기다렸는데...깔끔하게 다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재수를 하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재수를 하면서 정서적 안정감을 회복하는 시간을 보냈다. 옛날 까불고 장난쳤던 나의 모습이 나오기도 하고, 아무데나 붙으면 된다는 막무가내 소망이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 학교, 학과를 찾아보기도 했다. 미친 듯이 공부하진 못했지만 좋은 선생님들과 친구들을 만났고, 천천히 공부하고 웃고 떠들고 장난치며 시간을 보냈다. 중, 고등, 재수 시절을 통틀어 재수 시절 1년의 시간이 가장 재밌었던 거 같다. 마음의 안정감을 되찾고,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내면이 평화로우니 공부에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치열하진 않았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나는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다.
대학에 진학했다. 문과 시험을 봤는데 수리 성적이 잘 나와서 교차지원을 했다. 원래 문예창작학과나 국문과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교차지원을 하게 되면서 이공계 쪽으로 과를 넣게 되었다. 고심 끝에 의생명공학과에 들어갔다. 정말 적성에 안 맞았다. 부모님은 굉장히 맘에 들어 하셨지만 난 아무리 노력해도 애정이 가지 않았다. 너무 재미없었다. 다행히 학교에 전과 제도가 있어서 1학년 때 학점 관리를 열심히 하면 다른 과로 옮길 수 있었다. 전과에 기대를 걸고 1학년 학점 관리를 열심히 했다.
결국 영화영상학과에 전과했다. 학교에 한국어문학과도 있었는데 영상을 좋아한 나는 최종적으로 영화과를 선택했다. 사실 뭔가 더 재밌어 보이고 끌렸기 때문이다. 2학년 때부터 영화과 수업을 듣게 된 나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수업도 재밌었고 공부도 재밌었다. 가끔은 교양수업으로 문학 수업도 들으며 문학의 갈급함도 채웠다. 문학 시에 흠뻑 젖어 영화과와는 또 다른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다.
영화과 수업은 너무 좋았지만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진짜 수업은 수업 후 실제로 영화 찍는 현장에서 이뤄졌다. 감독이 연출을 하고, 배우는 연기를 하고, 촬영팀, 편집팀, 메이크업, 소품팀 등등 자기의 포지션대로 역할을 감당하며 영화를 찍었다. 학생 단편 영화지만 다들 진지하게 임했다. 이렇게 같이 영화를 찍으며 몸소 체험하며 영화학도들만의 우애와 친밀함을 다져간다. 그런데 나는 2학년 때 전과해 친한 친구도 없고 수업 시간 외엔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영화과에 동화되지 못했다. 맨 처음엔 이것저것 가르쳐주겠다는 선배도 있었고, 술 모임에도 종종 초대받았는데 영화과의 자유로움이라든지 동기들, 선·후배들의 친절함이 괜히 낯설고 두려웠다. 나는 수업만 듣고 가버리고, 수업 후 어떤 모임이나 영화 현장에 가지 않으며 외톨이 생활을 자처했다. 그래도 수업은 늘 재밌었고 특히 시나리오 수업이라든지, 스토리 만드는 수업은 너무 즐거웠다.
그렇게 조용히 지내다가 졸업 전, 그래도 단편 영화 하나는 찍어보고 싶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보통 영화 현장에 가서 직접 참여하고, 도와주며 감을 익혀야 했는데 나는 무작정 영화 제작에 도전했다. 친한 친구나 선후배들도 없어 팀 꾸리기도 힘든 상황인데 당장은 그냥 영화를 너무 찍고 싶어 앞뒤 생각지 않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시나리오를 제출하면 교수님이 시나리오를 선별하고 뽑힌 시나리오만 영화제작에 들어간다. 처음 쓴 시나리오는 탈락됐고, 두 번째 쓴 시나리오가 뽑혔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기존에 있던 이야기를 새롭게 각색했었고, 두 번째 시나리오는 경험을 토대로 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은 자전적 이야기였다. 역시 실제로 경험한 내용이 더 설득력 있게 전달되는 거 같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시나리오가 선정됐고 이제 영화를 찍을 준비를 해야 했다. 시나리오는 교수님과 함께 계속 수정 및 보완을 했고 개인적으로 팀원을 꾸리고 장비 준비 및 스케줄을 짜야 했다. 팀원을 꾸리기가 가장 어려웠다. 적극적으로 연락 오는 이도 없었고 '어떤 선배가 관심 있어 하더라.' 이런 소문만 있을 뿐. 나 또한 다른 영화에 참여한 적이 없어 당연한 결과였지만 참 막막했다. 팔 걷어붙이고 팀원을 찾지 않으면 영화는 찍지도 못할 판국이었다.
그래도 목표가 있으니 용기 내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각 포지션에 맞는 이들을 섭외했다. 제일 중요한 촬영감독! 촬영은 정말 잘하는 선배가 해줬으면 좋겠고 나머지 포지션은 그래도 맘 편히 작업할 수 있는 이들이면 됐었다. 그래서 촬영은 말 한 번도 못 해봤지만 잘한다고 소문난 선배에게 부탁했다. 영화에 대한 간절한 목표가 있다보니 나도 모르는 담대함이 나왔다.
“선배님! 제 영화 촬영 감독 꼭 해주세요!”
갑작스런 요청이 죄송스러웠지만 그래도 흔쾌히 수락해주셨고, 촬영팀은 그 선배 덕분에 잘 꾸릴 수 있었다. 배우는 지나가다 캐스팅하기도 하고 같은 과에 마음 맞는 친구를 컨택해 최종적으로 적합한 배우들을 잘 섭외했다. 나머지 피디, 믹싱, 편집, 미술팀 등은 다른 과 지인들까지 동원해 어렵게 팀을 만들었다.
문제는 실전이었다. 연출자는 영화를 만드는 진두지휘자인데 나는 팀 전체를 컨트롤하고 지시할 카리스마가 없었다. 만약 모든 구성원이 나와 친하고 편한 관계였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엔 잔뜩 긴장하고 얼어있는 작은 감독일 뿐이었다. 그래도 촬영이 다 끝난 후 ‘디렉션 잘했고 꽤나 감독 같았다’라는 말에 내심 기뻤다. ‘으샤으샤’한 분위기는 못 만들어도 기본적인 원칙을 잘 지키고 준비한 만큼 잘 진행하고 싶었다. 카리스마 있는 ‘레디 액션’은 아니었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완주했다는 것에 의의를 뒀다.
그래도 연기 연출은 매우 재밌었다. 친한 배우를 캐스팅해서 소통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감정을 살리기 위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의 실제 경험담을 나누고, 섬세한 감정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쓴 글이 눈 앞에 펼쳐지니 너무 재밌었다. 비록 쉬는 타임이나 밥 먹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하고 어떻게 분위기를 띄워야 할지 몰라 쭈구리로 있었지만, 촬영이 들어가면 모두가 집중하고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힘을 합해 주었다.
부족한 연출을 도와준 선배, 후배, 동기, 우리 팀원들. 너무 미안하고 감사하다. 영화 찍을 동안만이라도 카리스마를 부어달라고 한 기도는 정확하게 이뤄지진 않았지만, 영화 자체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담당교수님의 피드백도, 주변 반응도 좋았다. 나중에는 학교 추천으로 지역 인터넷방송국의 영화 프로그램에 1년간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하지만 끝 힘이 부족했다. 보통 영화를 다 만들고 나서 영화제 출품을 하는데 영화를 찍으며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 나는 도저히 영화제 출품 준비를 할 힘이 없었다. 출품 조건으로 영어번역자막, 기타 자료를 준비해야 했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리 팀에게 또 한 번 미안했다. 그래도 졸업 전 나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만든 것은 참 잘한 일인 것 같다. 많이 두렵고 부족했지만 잊지 못할 나의 추억이다. 또 한 번 나의 한계를 온몸으로 느꼈지만 나 나름대로 열심히 도전한 소중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