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솔루션다큐 막내작가

by 미니힐

원하던 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영화보다는 방송에 마음이 더 끌렸다. 방송작가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미디어 구인 사이트에서 작가 채용을 찾아보았고, 관심 있는 방송 프로그램 작가 채용에 이력서를 넣었다. 제발 연락이 오길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랐다.


한곳에서 연락이 왔다. 아이 솔루션 다큐프로그램 본사 제작팀이었다. 너무너무 기뼜다. 전화를 끊고 소리를 지르고 춤도 추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겨우 면접 날짜만 잡힌 것인데 마음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두렵고 설레는 맘으로 그날을 기다렸다.


두근두근 첫 면접. 막내작가 포지션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다만 예상외의 질문들이 있었다. 밤샘 작업이 가능한지, 술은 가능한지, 성격이 밝은지, 끈기 있게 버틸 수 있는지 등. 오고가는 질의 문답 속에서 점점 자신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뽑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밥도 안 들어가고 다른 일도 못 하겠고 핸드폰만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연락을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 후 면접에서 떨어졌단 사실을 알게 됐다. 망연자실했다. 불합격에 세상 무너진 듯 우울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이후 다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엔 꼭 일할 수 있길!’ 각오를 단디하고 눈을 반짝이며 불타오르는 마음으로 제작사로 향했다.


제작사 분위기는 내가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방송제작사라서 그런지 TV에서 보던 일반 회사와는 달리 매우 자유로워 보였다. 캐주얼한 복장, 자유분방한 느낌 등 제작사 분위기를 훔쳐보며 면접을 기다렸다. 대표와 1:1 면접을 보았다. 대표가 여자라는 점과 면접 중간에 담배를 피며 질문을 한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실 면접 때 담배는 예의가 아닌 거 같은데 당시에는 ‘방송제작사라서 이런 분위기인가?’ 생각하고 넘어갔다. 또 면접 전에 본 ‘헬프’라는 영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주인공 작가가 담배를 피며 글을 쓰는 장면이 자주 나왔는데 그 영화 때문인지 ‘예술가=담배’라는 인식이 잠깐 있었다. 아무튼 안 놀란 척하며 의연하게 면접에 임했다. 대표는 다리를 꼬고 담배를 피고 물었다. ‘그래요. 글 잘 써요?’, ‘영화과 나왔는데 왜 방송하려고 해요?’, ‘방송 좋아해요?’ 등등 나는 질문 하나하나에 온 우주의 기운을 담아 답했다.


“네. 글 쓰는 거 좋아합니다. 잘 쓰는 건 잘 모르겠는데... 예전에 학교에서 글짓기상을 몇 번 받은 적은 있습니다. 방송 정말 좋아합니다. 어떤 때는 영화보다 방송을 더 즐겨봅니다. 영화는 가끔 다소 폭력적이란 생각이 많이 들어요. 감독의 주관적인 생각이 집중적으로 들어가 있다 보니 방송보다 개인의 메시지가 너무 강한 거 같아요. 반면에 방송은 좀 더 부드럽게 이야기를 전하는 거 같아요. 아무래도 많은 대중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을 아우르며 표현되는 거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드라마, 기타 방송프로그램을 즐겨보았습니다. 방송 꼭 하고 싶습니다!!! 뽑아주시면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또 체력이나 밤샘 작업도 괜찮냐고 물었는데 무조건 괜찮다고 다 감당할 수 있다고 나의 의지와 열정을 최대한 어필했다. 느낌상 면접은 나쁘지 않았으나 바로 답이 오진 않았다.


며칠 후 연락이 왔다. 같이 일해보자고. 다음 주부터 노트북 가지고 오라고. 정말 뛸 듯이 기뻤다. 이 기쁜 소식을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sns에 마구마구 전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한 치 앞도 모르고.


생각 이상으로 제작사 일은 빡세고 고됐다. 방송국보다 프로덕션 제작사 상황은 더 열악했다. 기본 밤샘 작업과 주말근무까지. 몸은 힘들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 만큼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힘들 때마다 이를 악물고 ‘파이팅’을 외쳤다.


방송작가 일을 한다고 해서 바로 글을 쓰는 건 아니었다. 내가 맡은 프로는 휴먼솔루션 다큐였는데 가족 간의 (고부, 부부, 부녀, 모녀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 주간 관찰하고 상담전문가가 투입되어 코치해주는 내용이었다. 나의 롤, 막내작가 업무는 문제가 있는 가족들을 섭외하는 건데 쉽지않았다. 1회 방송인 데다가 어느 누가 당당히 가족 문제를 드러내겠는가. 섭외가 잘 안 돼서 될 때까지 회사에서 숙박을 했고, 날마다 전화로 사정하고 여성 커뮤니티 사이트에 쪽지와 메일을 날렸다.


감사하게도 출연진이 확정되면 촬영이 시작됐고, 피디님은 관찰카메라 테이프를 60개 넘게 찍어오셨다. 막내 작가들은 그 테이프 내용을 문서화시켜야 하는데 그 작업이 프리뷰다. 몇 분 몇 초에 어떤 말들이 오갔고, 어떤 장면인지를 자세히 적는다. 이 프리뷰를 메인 작가님이 보시고 편집 구성안을 짜고 피디님과 함께 편집을 완성한다. 열악한 제작사는 프리뷰어 알바를 구할 여력이 없다며 막내작가들을 혹독하게 굴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동료 작가는 프리뷰 후유증으로 손이 떨렸고, 황달이 됐지만 코앞으로 다가온 방송 날짜를 지키기 위해 계속 타자를 쳤다. 편집 기간이 끝난 후엔 졸린 눈을 비비고 새벽까지 자막 작업을 했고, 홍보 문안과 예고편 구성을 했다. 한편이 끝나면 다음 주 방송을 위해 또다시 섭외와 취재를 했고, 프리뷰, 자막 등 밤낮, 주말 가리지 않고 달렸다.


‘아...이게 방송국 생활이구나.’ 정말 힘들었지만 첫 작가 일이라서 그런지 열정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간혹 일 잘한다고 칭찬을 받으면 없던 힘도 생겼다. 함께하는 동료들도 너무 좋았고, 선배 작가님들, 피디님들도 나의 자세를 좋게 보셨다. 막내 작가 동료들은 같은 또래였고 같이 밤샘 작업을 하다 보니 금세 친해졌다. 같이 찜질방을 가고, 새벽에 감자탕을 먹으며, 방송 후 한잔하며 회포를 풀던 그 친목의 시간이 일을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섭외와 취재를 재밌게 하면서 이건 내가 좀 잘할 수 있겠단 마음이 들었다. 취재 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 어투, 태도를 보고 상대에게 어떤 질문,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고, 시의적절하게 답을 끌어냈다. 하지만 무리하게 파고들어 상대방을 곤란하게도 했고, 너무 감정이입을 하거나 상대방을 배려하다가 내가 진이 빠질 때도 있었다.


사례자 취재를 하면서 세상엔 참 다양한 분류의 사람들이 있고,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복잡한 문제와 상황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프리뷰를 하며 삶의 일부를 들여다보았다. 상담 전문가의 코칭과 노부부, 젊은 부부, 고부, 부녀, 모녀, 남녀노소 모든 관계 속에 오고가는 대화와 상황을 보면서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관계는 이런 것이구나’, ‘건강한 대화는 이런 것이구나’, ‘가정은 이런 것이구나’ 등 참 많은 생각과 감정이 오갔다.


방송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것은 이들의 힘들었던 문제가 조금씩 해결되고 조금이나마 회복의 기미가 보일 때였다. 방송 사정상 정해진 짧은 시간 안에 진행되는 거라 완벽한 해결은 어려워도 작은 변화가 일어나면 그 이후에는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6개월이 조금 지났을 때였나? 보통 메인 작가님이 40~50분 다큐 나레이션을 다 쓰는데 그중 10분 정도의 분량을 나에게 써보라고 하셨다. 기회를 주신 것이다. 잘 쓰고 싶은 마음에 밤을 새워서 읽고 또 읽어보며 나레이션을 써보았다. 나중에 방송 나온 걸 보니 대부분이 수정되었지만...그 시간을 경험한 뒤로 빨리 글을 써보고 싶었다. 입봉해서 내 구성안, 내 글을 써보고 싶었다. 입봉할 수 있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찾아야 했다. 대표님께 솔직히 말씀드렸고, 대표님도 쿨하게 'OK'해주셔서 8개월간의 막내 작가 일을 마무리 짓고, 다음 스텝을 준비했다.


나는 공부도 그리 잘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적인 부분에서는 늘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방송 일을 하면서 학력 좋고, 뛰어난 분들과 함께 일하고 생각을 나누고, 같이 경쟁도 하고, 위로도 하며 한배를 탈 수 있어 영광이었다. 또 글을 쓰고 싶고,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 방송에 대한 열정만으로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도 새삼 감사했다. ‘넌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을 거야.’라고 새로운 꿈과 희망을 심겨준 피디님, 작가님들께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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