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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인생은조연]
제20편. 나는 개똥벌레

아홉 살 가을 소풍, 나를 울린 노래

by 김현이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저기 개똥무덤이 내 집인걸

가슴을 내밀어도 친구가 없네 노래하던 새들도 멀리 날아가네~~~"


누구나 알고 있는 노래, 멜로디는 가볍고 부드럽지만 가사는 그렇지 않은 노래, 신형원씨의 음색이 돋보이는 놀래 "개똥벌레" 다. 출근길 사무실 주차장까지 도착하여 내리려는 찰나,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시동버튼까지 갔던 손목을 다시 내려 놓으며 노래를 들었다. 1절을 듣고서 2절마저 듣기엔 시간이 좀 촉박한 듯 하여 아쉬운 마음에 사무실로 들어가며 속으로 '나는 개똥벌레 친구가 없네 손을 잡고 싶지만 모두 떠나가네...' 를 읊조리는데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맑은 콧물이 흘러나왔다. 나도몰래 코를 훌쩍거리니까 사무실에 계시던 팀장님께서 "관리반장~ 감기 걸렸어?" 물으신다. 아니라고 인사하며 황급히 탈의실로 뛰어올라갔다.


29년전, 초등학교 2학년 아홉살 가을 소풍날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에 순간의 감정이 치밀었고 기억은 머리로 하는게 아님을 또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건강이 좋은 분이 아니셨다. 어렸을 적에도 아침밥상을 할머니께서 차려주신 적이 몇 번씩 있었는데 그날은 엄마가 밤중에 몸이 나빠져 급하게 병원에 가셨기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침상을 할머니께서 봐주셨던 것이다. 아홉 살 가을 소풍날, 엄마는 아빠와 같은 광산에 다니셨던 아저씨네의 딸이 입다가 작아진 하얀색 투피스를 얻어다가 내 소풍날에 입고 가라며 며칠전 부터 옷장에 넣어두시고는 "현이야, 다음번엔 진짜로 이쁜 새옷 사줄게" 하시며 어린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곤 하셨는데 소풍 아침날 엄마가 아침밥상에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 직감적으로 나는 엄마가 밤새 아파서 병원에 가셨다는 걸 알았고 그날 소풍은 누가 나를 따라올지 그 투피스는 누가 입혀줄지 작은 고민을 했던 걸로 기억이 된다. 할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가방을 매고 미리 챙겨 두었던 하얀색 투피스를 입고 학교에 갔다. 나는 씩씩한 대신 자존심이 굉장히 센 아이였는데 소풍 따위에 엄마가 따라오지 않으셔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열명 남짓한 아이들이 다니던 시골마을의 작은 분교가 내 학교 였으니 당연히 친구들도 가족들도 누구든 그집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던 터라 그 날 친구의 엄마는 처음부터 나를 유난히 챙겨 주셨던게 기억 난다. 내가 아무리 자존심이 강하고 씩씩한 아이였대도 나는 작은 아이에 불과했다. 엄마가 없으니 기가 죽었던 게 뻔했으니까. 보물찾기를 해도 신나지 않았고 간식으로 싸준 과자를 먹어도 기쁜 줄 몰랐는데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엄마가 오셨다고 하셨다. 설마했지만 정말로 엄마가 학부모들이 모여있는 자리에 지금의 기억에도 창백하고 기운없는 모습으로 앉아 계셨다.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엄마는 병원에서 언제 오셨는지 그 와중에 잘 하지 않으시던 화장까지 하고 계셨다. 난 그래도 그런 엄마의 모습이 기쁘지가 않았다. 아픈 엄마가 걱정이 되었던 것보다도 그냥 엄마가 그것도 아픈모습으로 나타난 게 어린 나에게는 야속하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학생들, 선생님, 그리고 학부모님들이 함께 잔디 언덕에 모여 앉아 장기자랑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때도 나는 박수도 치지 않고 엄마 옆에도 앉지 않고 구석에서 애꿎은 풀만 쥐어 뜯으며 뽀루뚱하게 있었는데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시더니 나를 앞으로 나오라고 하시는 거였다. 선생님은 내게 개똥벌레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셨고, 그건 엄마가 선생님께 '우리 현이가 개똥벌레 노래를 아주 잘 부르니 한번 시켜주라는'는 부탁을 하셨다는 걸 어린 나이임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앞에서서 쭈뼛쭈뼛 망설였지만 나는 노래를 불렀다.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저기 개똥무덤이 내 집인걸... 가슴을 내밀어도 친구가 없네 손을 잡고 싶지만 모두 떠나가네 가지마라 가지마라 가지 말아라......"


생각이라는 사실은 시간이 기억을 퇴색시키 듯 그날의 단체사진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지만 마음속의 진실은 언제까지 살아 있는 법이다. 어른이 되어서 만난 친구들은 그날에 입었던 투피스가 누군가에게서 물려 받아 입은 옷인줄도 모르고 그 사진을 보면서 내 옷이 가장 이쁘고 내가 가장 예쁜 아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새초롬하게 두 다리를 곱게하고 앉아 있는 사진속의 그 여자 아이는 개똥벌레 노래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기억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고 30년이나 다 지난 지금 한 번씩 흘러나오는 노래에도 옛 생각에 마음이 열리는건 사람의 생각과 기억이란 머리보다는 마음에서 한다는 걸, 머릿속에서의 사실과 달리 마음속의 진실은 엄연히 누구의 마음이든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한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개똥벌레 -, 촌스러운 이름을 갖고 있는 이 벌레가 진짜로는 보석같은 '반딧불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벌써 그 어린나이에도 개똥벌레에 내 자신을 희화시켜가며 철든 어른 흉내를 내려던 발칙한 아이가 아니였을까 지금에와서 회상해 보니 문득 그런 생각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흐린 가을날 아침에 다녀온 내 유년시절은 나를 또 한번 철 든 어른으로 성장시킨 자극제가된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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