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들래 Oct 07. 2024

길 위에서 만난 문장

마드리드 카페 히혼에서의 단상

  "세상은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쪽만을 읽은 사람이다."


  문학과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표현에 격하게 공감하지 않을까? 

완전한 독서를 위해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길 위의 어떤 공간에서 작가의 작품에서 언급한 공간과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 묘한 쾌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런 공간 중 한 곳이 바로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그란 카페 히혼이었다. 마드리드에 머무는 동안 꼭 다녀오고 싶었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15분 남짓한 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도보로 이동 가능했다. 지금도 시벨레스 광장 분수 앞에서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아이들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분수와 햇빛 사이로 꼬마들의 반짝이는 웃음소리가 아직도 내 귓전에 맴돌고 있으니까.


  1888년 창업한 이후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배출한 카페라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지 않은가. 1930년대부터 문학가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카페 히혼을 향한 내 발걸음은 설렘으로 가득 찬 채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13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히혼은 스페인 내전과 2차 대전을 겪은 후, 시대에 맞게 개조했다. 1949년에는 카페 히혼 문학상을 제정했고 이후 히혼 시의 재정 지원에 따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여전히 예술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는 명실공히 마드리드의 훌륭한 문학카페로 자리매김 한 곳이다. 


  역사가 느껴지는 장소여서일까? 역사에 근거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한때는 마차로 카페 앞에 도착한 고객이 있었을 테고 인근에 사는 이들이라면 나처럼 도보로 카페를 방문했겠지. 입장해서 그들은 무엇을 주문했을까?  커피나 가볍게 상그리아 한 잔, 혹은 헤밍웨이 작품 속 노인처럼 브랜디를 주문했을까? 어떤 차림이었을까? 실내 흡연이 자연스러웠을까? 마주한 사람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어떤 장르의 음악이 흘렀을까? 헤밍웨이 작품 속 나이 많은 웨이터처럼 히혼의 웨이터들도 깨끗한 것을 좋아했을까?


  문득 창립자가 지금의 카페 히혼을 방문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히혼이란 카페가 스페인에서 유명한 카페 중 한 곳이 되어 자국의 변화무쌍한 예술과 사회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기분이 어떨까? 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들의 흔적을 테이블 곳곳에서 느껴 보려고 끊임없이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는 걸 안다면 흐뭇해할까? 


  아무래도 젊은이들보다 중년 이상의 손님들이 많이 찾는 듯싶었다. 2014년 이후 9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힙스터와 레트로 열풍이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카페 히혼으로 발걸음 하는 층들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바깥 날씨가 좋아서 실내보다 야외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화장실 볼일을 보러 가던 중에 히혼만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듯한 자줏빛 실내 풍경을 두루 살펴보았다. 쌀쌀한 날씨였다면 실내에서 시간을 보냈을 텐데 대부분의 손님들이 거의 실외로 빠져나간 상태라 실내는 썰렁했다. 다시 야외로 나와서 자리를 잡고 앉으니 마침 웨이터가 주문한 샹그리아 한 잔과 타파스를 가져다주었다. 빛깔도 곱고 달콤한 샹그리아였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히혼의 단골이었다는 헤밍웨이의 「깨끗하고 밝은 곳」이란 단편을 떠올렸다. 혹시 작중 노인이 자주 들렀던 카페가 이곳은 아니었을까? 야외 카페 분위기가 작품의 첫 문장을 연상케 했다. 


  늦은 밤 카페 손님이 모두 떠났는데도 한 노인이 전등 불빛 아래 앉아 있는 풍경을 그려보았다. 낮에 떠다니던 먼지를 밤에 내린 이슬이 가라앉혀 준 그곳에 앉아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기를 좋아했던 노인의 뒷모습을 상상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나뭇잎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 아래 앉아 있는 노인의 쓸쓸한 뒷모습에서 노년의 당신과 내 모습을 떠올려보는데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나 역시 깨끗하고 기분 좋은 카페, 불빛이 환하고 밝으며 나무 그늘이 있는 카페를 선호한다. 노인도, 다른 손님들도 그런 의미에서 깨끗하고 밝은 카페를 찾는 게 아닐까? 지금 앉아있는 내 자리에서 바라볼 때 어디쯤에 노인은 앉아 있었을까? 헤밍웨이 시선에 잡힌 어느 인물에 대한 묘사가 명징하게 빛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공간이 한몫했을 수도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든 팀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멀리 비즈니스로 만난 듯 보이는 남성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디에도 고독한 노년의 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고독한 노인은 낮 시간보다 밤 시간을 선호하겠지. 고독한 노인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이 많은 웨이터가 자신과 나눈 대화를 밤의 카페 히혼에서 읽어보면 백퍼 공감하게 될 것이다. 


  "불빛도 중요하지만 깨끗하고 아늑해야 해. (……) 도대체 그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일까? 그것은 두려움도 공포도 아니야. 그것은 그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허무라는 거지. 그것은 모두 허무였고, 인간도 한낱 허무에 지나지 않거든. 모든 것이 오직 허무뿐, 필요한 것은 밝은 불빛과 어떤 종류의 깨끗함과 질서야."   <깨끗하고 밝은 곳> 중에서


  나이 많은 웨이터는 매일 밤 카페가 필요한 누군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게 문을 닫을 때마다 망설인다. 밤새 술을 파는 다른 술집도 있지만 깨끗하고 밝은 곳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마드리드를 방문해서 히혼을 찾는다면 밤 시간에 찾을 것이다. 젊은 웨이터보다 헤밍웨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나이 많은 웨이터를 만나는 행운을 경험할 수 있다면 기쁘겠다. 왠지 나이 많은 웨이터를 금세 알아볼 것 같았다. 지금 막 들어선 여인이 얼마나 이 공간에서의 휴식을 필요로 하는지. 허무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밝은 불빛과 깨끗함과 질서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말이다. 무이면서 무이고 무인 그가 무인 나를 알아볼 것이다. 


  글을 쓴다는 건 언제나 고독한 일이라고 했던 헤밍웨이, 어쩌면 깨끗하고 밝은 카페의 단골 노인은 그의 자화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작중 인물로 빗대어 놓은 것은 아닐는지. 노인에 대한 서사가 많진 않았지만 그에게 감정이입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살면서 느꼈던 허무한 감정을 고독한 작가의 문장으로 잠시나마 위로받는 느낌이었으니까.


  헤밍웨이는 굳이 마드리드뿐 아니라 바르셀로나, 톨레도, 세비야, 론다, 말라가 등 스페인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자신의 흔적과 사유를 간결한 문체로 옮겨놓았다. 그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내가 걸었던 길, 그때 노을을 바라보며 느꼈던 정서, 술집 즐비한 골목길에서 고독과 허무가 깔린 취객들의 음색이 마구잡이로 뒤섞여서 전해져 왔다. 현장의 생생함과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읽는 이로 하여금 그냥 글 속 세상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스페인 여행은 때때로 헤밍웨이가 안내하는 도시를 찾아 떠돌다가 안착하게 도와주곤 했다. 


  헤밍웨이의 단편집을 읽지 않았다면 그저 커피 한 잔, 와인 한잔 하며 휴식을 취하는 카페, 혹은 로컬들과 여행객들 사이에서 잠시 머물고 가는 장소 정도로만 알았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곳이 언제 지어졌고 역사적으로 어떤 역할을 한 장소이며, 그 시절 그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인지하고 나서 그 공간을 다시 찾게 된다면 여행자의 시선은 사뭇 달라진다. 동시에 확장되고 깊어질 것이다. 그곳에서의 시간이 결코 이전의 시간과는 다를 것이다.


  10년이 흘렀지만 그때 사진을 들추어보고 있노라니 마드리드에서의 자잘한 추억들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추억이란 그래서 소중하다. 여행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 여행은 심심한 여행이 될 것이다. 그렇다. 기억하는 것은 그 공간을 다시 여행하는 것이다. 추억 여행은 할 때마다 그 색깔이 달라진다. 주홍색이었다가 녹색이었다가 잠시 파란색으로 넘어가서는 다시 보라색으로 또다시 회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한다. 그 여행의 주인공은 시공을 초월해서 사진 속 현장으로 다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은 처음엔 흑백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채로운 색으로 변해간다. 금방 오감을 자극하는 진짜 여행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플래시백, 카페 히혼 테라스에 앉아 있는 여인이 보인다. 그 여인은 따뜻한 커피 잔을 마주 잡은 채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있는 중년 여인네들의 담소에 귀 기울인다. 그때 두 뺨으로 불어오는 외롭고 소슬한 갈바람을 느낀다. 지그시 눈 감고 있는 여인이 세피아 톤의 흑백사진으로 남는다.


  기억을 반추하면서 그때  읽지 못했던 헤밍웨이의 책 몇 권을 꺼내 들었다. 그가 왜 스페인을 그토록 사랑했는지 떠올려보았다. 어쩌면 깨끗하고 밝은 하늘과 쨍한 태양을 자주 만날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나 역시 카페 히혼 야외 뜰에서 바라본 맑고 투명했던 하늘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 


  여행 중에 준비하면 좋을 얇고 가벼운 책, <깨끗하고 밝은 곳> 단편집을 권한다.





                     

이전 12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