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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들래 Oct 07. 2024

리틀 포레스트

혜원의 공간을 찾아 군위 미성마을로...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 거실에서, 준비해 간 시집을 펼쳤다. 시 한 편을 읽는데 잠시 가슴 뭉클, 다시 서글픔에 마음이 아파왔다. 재클린 우드슨의 '엄마'라는 시다.


  인동운모 파우더 냄새는 어떨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 향이다. 시인의 엄마에게 그런 냄새가 났다는데... 인동은 꽃이란다. 시인은 가끔 엄마가 그리워서 가슴이 아파 오면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화장품 코너에 가서 판매원에게 인동향기 좀 맡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냄새를 몇 초 동안 맡는 동안 다시 엄마가 살아온 것처럼 엄마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모두 떠올랐다는데.


  혜원(김태리)은 엄마와 살던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의 향기를 맡았을까? 엄마와 평상에 앉아 토마토를 먹으며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렸을까? 어쩌면 그녀가 만들어 먹는 소박한 음식은 결국 엄마이고, 엄마와의 추억이며, 엄마의 향기였으리라.


  서울에서의 노곤한 삶 앞에서 답이 없다고, 아니 어떤 출구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불현듯 달려온 고향집에서 그녀는 아늑한 평화를 얻는다. 자신이 있을 곳은 그곳이라는 듯. 첫 끼를 해결하고 안도하는 순간 관객인 나는 알아버렸다. 그녀가 있어야 할 거처가 바로 그곳임을.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직전 그녀도 그리 생각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뒤뜰 유채꽃이 얼마나 이쁘던지 앞마당보다 뒤뜰에서 더 길게 산보했다. 어디선가 뭔가를 찌는 냄새가 폴폴 날려왔다. 달큰한 고구마일까 포슬포슬한 감자일까. 냄새가 순식간에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혜원이 해 먹던 갖가지 요리가 떠올랐다. 무엇보다 혜원이 직접 쪄낸 팥고물 듬뿍 얹은 삼색설기가 먹고 싶었다. 배고프던 차에 관람한 영화라 모락모락 김을 뿜어대며 맛나게 쪄지던 장면 앞에서 얼마나 군침을 나던지. 음식 영화 관람 전엔 적당히 위장을 채워야 한다는 걸 알았음에도 배고픈 상태라 고통스러웠다.


  그녀가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한 뒤, 난롯불 앞에서 멍 때리기 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지금 여기에서의 모든 정서를 끌어모으고 있다. 고향에 왔구나 하는 푸근함이 느껴지는 천정을 바라보며, 아직도 잘 정돈된 주방 물품을 바라보며, 주방의 말간 유리창 밖으로 펼쳐지는 앞마당 풍경을 바라보며, 진짜 감이 아니라 살짝 실망했지만 처마 밑에 주렁주렁 달린 주황빛 감을 바라보며, 가짜 감이라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구나. 영화 속 집답게 혜원의 집을 장식하고 있는 거니까. 거기에 뒤뜰에 만개한 유채꽃의 자태를 바라보는 건 덤이었다. 


  혜원 그녀가 동네 곳곳을 누비며 달렸던 자전거는 창고 앞에 그대로 놓여있다. 자전거 타고 마을을 자유롭게 횡행했던 혜원의 뒤를 쫓아보았다. 혜원처럼 안도할 어딘가를 찾고 싶었다. 그녀가 평화를 얻은 곳에서 나도 그 비슷한 평화의 여파를 체험하고 싶었나 보다. 


  안락한 마루에서 마냥 늘어지게 있다가 오수까지 즐기려고 했다. 그러나 새로운 방문객이 마루문을 빼꼼히 열다가 '죄송해요'하고 얼른 문을 닫는다. 주인행세를 하고 마루를 차지한 채 앉아있는 내 모습에 당황했던 것 같다. 이제 혜원의 마루를 다른 방문객한테 양보할 시간이다. 일어서고 싶지 않았지만 내 집은 아니기에 천천히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세워야 했다.


  살다가 내 뜻대로 뭐 하나 되는 게 없을 때 일상을 잠시 멈추고 마음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라. 그곳에서 익숙하고 정겨운 벗들을 만날 수도, 아니면 새로운 친구를 만날 수도 있다. 그곳에 머물며 직접 한 끼 식사를 정성스레 준비해 보는 것도 좋겠다. 혜원처럼. 


  그 계절이 어떤 계절이든 상관없다. 제철 나물과 먹거리로 소박한 식탁을 차리고 마주 앉은 벗과 도란도란 수다를 떨어보자. 마주 앉아있을 벗이 없어도 괜찮다. 마루 앞 나뭇잎을 흔들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어린 느티나무와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흘러가는 뭉게구름에게 말을 걸 수도 있을 테고.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내 속얘길 들려줄 수도 있을 거다.


  그런 여행을 떠나보고 싶지 않은가. 망설이지 말아라. 어디든 내 공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슬퍼하지 말라. 멀리 나서지 않아도 가능하다. 뒷동산 혹은 공원의 한가로운 벤치도 좋지 않은가. 거기서 바라보는 모든 자연이 내 친구가 되어줄 테니. 


  사람친구만이 친구가 아님을 빨리 인지해라. 외로울 땐 커피 한 잔도 친구가 되어주더라. 암전 된 영화관에서 두 시간짜리 인생을 만나고 나오는 것도 친구와 대화 나누는 것 이상의 즐거움을 선사할 때가 있더라. 좋아하는 음반을 찾아 고요하게 감상해 보아라. 음악이 친구 목소리처럼 들릴 때가 있더라. 아니 더 달콤하게 내 마음을 위무해 주는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더라.


  리틀포레스트는 소박한 행복을 고요하게 알려주는 영화다. 그래서 가끔 소박한 행복 위에 작은 행복 하나를 더하고 싶을 때 꺼내보곤 하는 영화다. 혜원이가 좋고, 태리가 사랑스럽고, 소리엄마와 함께 머물던 아담한 기와집이 내 집처럼 정겹고 아름답다.


  군위에 위치한 미성 마을은 아담했다. 그동안 전국 방방곡곡 여행하며 많은 벽화마을을 만났지만 미성 마을 리틀 포레스트 벽화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았다. 완성도나 작품성도 뛰어나다. 어쨌든 미성 마을의 주민인 것처럼 세 시간 남짓 보내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화본역으로 차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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