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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들래 Oct 24. 2024

사월에, 나는

사월이 봄바람처럼 살랑거렸다

  오감으로 사월을 맞았다. 봄바람이 향기로웠다. 사월의 빛이 어제까지 눈부셨는데 밤새 내린 비로 봄꽃이 떨어지고 도로는 흠뻑 젖었다. 사월이면 어김없이 T.S. 엘리엇의 시구를 떠올린다. 잔인하게 춥고, 잔인하게 아름답고, 잔인하게 그리운 계절이니까.

  그의 시 「황무지」는 총 434행으로 이루어진 詩다. 시 전부를 완독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그 유명한 첫 행,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으리라. 내게 황무지의 첫 행은 사월을 알리는 서곡처럼 느껴졌다.

  첫행을 반복적으로 읊조리고 있노라면 건조하고 매서운 사월 꽃샘바람이 온몸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기분이 들곤 했다. 시에서 엘리엇이 말하고 싶어 한 정신적 메마름은 서걱거렸고, 불신으로 가슴 쓰렸으며, 재생이 거부된 죽음과 같은 정서는 밀물처럼 가슴으로 치고 들어왔다. 오늘처럼 서늘한 봄비가 내리는 날, 이 시를 다시 읊고 있노라니 한 겹의 외투를 더 껴입어야 될 정도로 온몸에 한기가 몰려왔다.


  매년 이맘때 즈음이면 꺼내서 듣곤 하는 노래가 있다. <봄날은 간다>라는 곡이다. 여러 가수 버전으로 녹음한 CD를 선물해 준 인생 선배도 지금쯤 듣고 있으려나? 장사익과 최백호, 한영애와 백설희, 그리고 조용필의 버전으로 봄날은 간다를 따라 부르며 황무지 같은 사월을 만끽하고 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잊은 채. 그저 나는 사월을,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낼 뿐이다.

  노래를 들으며 책장을 정리했다. 부스러질 만큼 낡고 색 바랜 강은교의 산문집 『추억제』를 꺼내들었다. 큼큼 거리며 책 냄새를 맡았다. 십 대 후반에 구입한 책을 육십 대 초반에 다시 펼쳤다. 어색한 문장이 눈에 띄지 않았다. 세대를 넘어서서 공감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기를 몇 차례. 그래, 사월엔 추억해야 할 것들이 정말 많구나. 하나하나 차근차근 꺼내보자.

  내 삶의 봄날과 여름날은 언제였을까. 지금 나는 인생의 어느 계절을 걸어가고 있는 걸까. 깊은 세월의 냄새가 폴폴 날리는 추억제에서 내 지나온 날들과 조우했다. 호밀빵 말린 냄새가 이럴까? 추억의 향기는 언제나 힘이 있다.

  강은교는 인간은 사랑의 실패에서부터 성장한다고 썼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문장 앞에서 어떤 에너지가 느껴졌다. 인문학의 힘이다. 글을 읽고 어떤 느낌이었냐고 작가가 내게 물었다.

  그땐 그랬죠. 그래요. 그 시절 날 추억하면 부끄럽고 여러모로 부족했죠.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젊음이 빛나던 시절이었죠. 가능성이 무궁하게 열려 있었으니까요. 현재 모습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삶의 과정 모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당하게 답했다. 실수하고 인정하고 수정하며 다시 도전하고, 좌절하다가, 극복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고통스러웠지만 인내하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지 않은가? 거기에서 배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늘 너무 늦게 찾아오는 깨달음. 온전한 대가를 지불하고 나서야 더디게 깨닫는다. 지혜롭게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생생한 자기 경험이 필요하다고 위로하면서. 그게 결국 삶이지 않은가?


  사월의 어느 날, 정동길을 따라 걸었다. 사월의 의식처럼 은행잎 변천 과정을 세세히 관찰했다. 아기 새끼손톱 만큼씩 돋아나는 연록의 은행잎, 얼마나 눈물겨운 풍경인지. 사월 초순경 은행잎을 본 적이 있나? 아직 만나지 못했다면 내년 사월엔 꼭 만나보라. 삶을 순수하게 긍정하는 순간을 맛보게 되리니. 어쩌면 눈시울이 시큰해질 수도 있으리라. 그 사랑스럽고 앙증맞은 생명체 앞에서!

  덕수궁 대한문을 들어서자마자 봄바람에 날리던 라일락 향기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덕수궁으로 봄꽃들이 모두 소풍 나온 걸까? 모든 봄꽃이 다 피어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월 꽃들의 향연 못지않게 마음 설렜던 연록의 새싹들이라니. 순하디 순한 모습을 숨기고 싶어 하듯 빼꼼히 얼굴을 내밀던 사월의 나뭇잎까지. 내 시선을 오래도록 부여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고궁에서는 세월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여고생 때, 답답한 가슴 부여잡고 둘러보던 석조전 앞 연못 앞에 다시 섰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풍경은 거의 없다.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풍경을 다르게 보이게 하면 모를까. 수십 번의 봄을 맞고 봄꽃을 피우고 봄꽃을 떨구고 했던 고궁은 그저 찾을 때마다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장소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고궁은 언제나 마음의 평화를 선사했다.

  선조의 시대를, 고종의 시대를, 일제 강점기를 다 기억하고 있을 흙과 궁과 나무와 연못 주변을 둘러보며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이 일순간 대견해 보였다. 지금까지 잘 살아온 자신에게 순간 고마운 마음까지 들더라.

  평일 한적한 오후 덕수궁엔 친구 혹은 연인과 함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외국인 관광객도 많았다.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계획한 나는 충만하게 고요한 시간을 즐겼다. 근대 역사 산책길을 홀로 걷노라니 찬찬히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덕혜옹주의 유치원이기도 했던 준명당 앞에 섰다. 바로 앞 돌바닥에 난 여러 개의 동그란 홈이 보였다. 덕혜옹주를 향한 아버지 고종의 사랑이 느껴졌다. 아이들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서 설치한 난간이 박혀 있던 자국이라니. 자연물은 세월과 무관하구나.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벗들과 총총 뛰어다녔을 덕혜옹주의 발랄한 모습을 그려보았다. 벚꽃 흩날리는 사월을 배경으로 덕혜옹주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그려보다가 멀리 석어당으로 시선을 던졌다.

  단청 없이 나무색 건물인 석어당은 우아한 자태 그대로였고 석어당 앞 살구나무에도 파릇파릇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석어당에서 정관헌으로 향하는 돌담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아름답다는 유현문을 마주하고 섰다. 근처에서 날아온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봄바람을 타고 후각을 자극하던 그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다. 시공을 초월하는 바람이었다. 봄빛, 봄 향, 봄바람을 만끽했다.


  저녁 일정에 맞춰 2호선을 향해 걷는데 프리지어 향기가 날렸다. 들어선 화원에서 좀 더 확실한 사월을 체감했다. 엘리엇이 첫행부터 외친 가장 잔인한 계절 사월에 꽃 한 다발을 사지 않으면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면 자신을 위해 한 다발의 꽃을 선물하는 건 어떨까?

  4월이란 계절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오늘 하루도 어제처럼 혹은 어제보다 조금 더 잘 살아내는 것이다. 프리지어가 내게 미소 짓는다. 프리지어의 노란 미소가 속삭였다. 속삭임은 향기로 번졌고 후각을 자극했다. 식물과 대화 나누기 더없이 좋은 계절 사월이다. 프리지어에게 미소로 답례하며 을지로행 전철을 기다렸다. 전철역 시 게시판도 봄이었다. ‘사월입니다’라는 시어가 봄바람처럼 살랑거렸다.


지난 4월, 통의동 라갤러리, 박노해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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