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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들래 Oct 06. 2024

춘천 속 작은 스페인

스페인 가정식 식당, 아워 테이스트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지 만 10년이 지나간다. 2014년 9월에 떠난 스페인 여행이 자꾸 떠오르던 즈음 우연히 알게 된 스페인 가정식 식당을 방문했다. 춘천 봉의산 자락, 고즈넉한 주택가에 위치한 식당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그냥 지나칠 오래된 건물 1층에 자리 잡고 있는데 자세히 봐야 이곳이 스페인 식당임을 알 수 있다. 그곳이 바로 아워 테이스트!


  춘천에서 오전 일정을 마치고 열두 시 예약해 둔 시간에 맞춰 옥천동에 위치한 식당에 도착했다. 원래 문어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 미리 주문을 넣었다. 아쉽게도 재료 공수가 방문하는 날 오후 늦게나 도착한다기에 주인장의 추천을 받아 하몽 바질 페스토 파스타로 메뉴를 정했다.

  예약한 시간보다 십분 늦게 도착, 내부로 들어서자 육인용 테이블이 두 개 준비된 아주 아담한 공간이 펼쳐졌다. 이미 한 팀(여성 사인)이 와서 애피타이저를 들고 있었고. 난 안쪽 화이트톤 테이블에 단정하게 세팅된 일인 좌석에 앉았다.

  미리 주문한 여름의 와인 '띤또 데 베라노 Tinto de verano'와 서비스 안주를 준비해 주었다. 스페인 여행 중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샹그리아와는 맛이 살짝 다르지만 여름의 와인이란 의미에 걸맞게 상큼한 맛이었다. 오후 운전만 아니었다면 한 잔 더 주문해서 마시고 싶을 정도였다.

  애피타이저로 주문한 크로케타스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방금 튀겨낸 크로케타스에 레몬즙 듬뿍 뿌려서 한입 베어 문 순간의 행복이라니. 이건 룸메이트에게도 꼭 맛 보여주고 싶을 만큼 취향 저격 메뉴로 단번에 등극했다. 서비스 치즈 안주와 크로케타스로 여름의 와인은 달콤하게 목줄을 타고 넘어갔다.

  약하게 퍼지던 알코올 기운이 온몸으로 번지고, 주인장의 정서가 느껴지는 BGM 플레이리스트는 입맛을 더 돋우어 주었다. 옆 테이블 사인 여성팀의 적당한 담소가 스페인 가정식 식당을 상큼한 분위기로 채워주고 있었다. 


  아워 테이스트의 주인장의 인터뷰 기사가 생각났다. 자영업을 종합 예술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녀는 인테리어는 물론 공간을 채우는 음악과  요리 모두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는 식당 철학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녀의 공간 아워 테이스트는 단지 배만 채우는 식당이 아니라 손님들과 함께 스페인을 떠올리게 하는 문학, 음악, 영화에 대해 논하고 경험하며 새로운 취향을 찾아가는 복합문화공간이었다. 그녀의 취지대로 아워 테이스트에서 스페인 남부에 위치한 말라가를 떠올리며 피카소를, 바르셀로나를 떠올리며 가우디와 달리를, 톨레도에서의 시간을 추억하며 세르반테스와 황홀한 일몰을, 세비야와 코르도바를 생각하며 카르멘을, 그라나다를 추억하며 타레가를 떠올리지 않았던가? 


  스페인에서의 시간을 추억하고 있노라니 어느새 식탁에 준비된 하몽 바질 페스토 파스타! 처음 맛본 파스타가 내 입맛에 그다지 맞지는 않았지만 먹다 보니 깔끔하게 비웠다. 여름의 와인도 거의 바닥을 드러낼 때, 주인장이 서비스 디저트로 부드러운 푸딩을 가져다준다. 메뉴에 커피가 없지만 원하면 에스프레소를 내려줄 수 있다기에 한 잔을 요구했다. 서비스 안주, 디저트, 거기에 에스프레소까지. 기분 좋은 스페인식 점심 식사였다. 춘천에서 즐긴 스페인 음식 여행인 셈이다. 

  여름의 와인 띤또 데 베라노의 알코올 기운이 사라질 때까지 식사 후 1시간 30분 정도 컴퓨터 작업을 했다. 2시간쯤 됐을까? 주인장이 라디오 프로그램 방송 스케줄이 있다기에 자리를 뜰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술기운도 어느 정도 사라졌다. 나 때문에 방송시간 약속에 마음 졸였을 걸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자리를 털면서 곧바로 든 생각은 내일 룸메이트와 다시 방문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러면 내일은 문어 스테이크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가능하다는 화답을 듣고 즉석에서 내일 저녁으로 빠에야와 문어 스테이크, 스페인 에일맥주를 주문하고 예약을 마쳤다.


  다음날 방문해서는 어제 앉았던 화이트톤 테이블이 아닌 원목 테이블에 자리했다.

  주문한 맥주와 서비스 안주가 나왔고, 크로케타스와 문어 스테이크가 준비됐다. 문어 스테이크 소스가 독특한 게 내 입맛을 제대로 공략했다. 처음 맛보는 문어 스테이크로 일단 입맛을 돋우고 있자니, 마드리드와 발렌시아에서 여러 차례 즐겼던 빠에야가 식탁 앞에 놓였다. 1.5인분이라는데 우리 부부에게는 좀 과한 양인듯싶었다. 천천히 먹다 보니 결국 모두 비워진 그릇 앞에서 미소 지을 밖에. 역시 디저트와 에스프레소를 준비해 주었다. 

  옆 테이블 세팅된 걸로 보아 이인 예약인 것 같은데 우리보다 늦은 시간인 모양이다. 우리 부부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식사를 하는 동안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워 테이스트 저녁 식사 시간은 오롯이 우리 부부만을 위한 자리인 듯 조용하고 따뜻한 공간으로 채워졌다.


  주인장과 기분 좋게 감사 인사를 나누고 계산을 마친 뒤 술도 깰 겸 옥천동 언덕길을 올랐다. 살고 싶은 집들이 있는 반면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집들도 보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전망 좋은 풍경이 펼쳐질 정도로 고지대에 위치한 동네였다. 

  중고등학교 교정도 보였다. 학생들 교통편은 어떻게 될까, 버스에서 내려 이 언덕길까지 걸어 올라와야 되는 걸까? 아, 힘들겠다. 뭐 이런 생각을 하고 걷노라니 한림대학교 캠퍼스가 눈앞에 펼쳐졌다. 캠퍼스를 둘러보다가 다시 언덕길을 내려왔다. 이번 여행에서 왠지 춘천의 깊은 속살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친숙한 도시, 자주 발걸음 하고 싶은 도시 춘천, 언제 와도 나를 반겨주는 것 같은 도시였다. 


  아워 테이스트, 이 스페인 가정식 식당에 계속 마음이 끌리는 것은 다름 아닌 주인장 때문이다. 그녀는 영업이 없는 날에는 유화를 그리고 피아노를 연주한다. 식당에 놓인 피아노 건반에 그녀의 손길이 자주 머물렀겠구나.

 그녀는 또한 춘천 MBC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에 출연해서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에 정기 출연 중이라고 한다. 영화를 소개한다니? 그것도 음식 관련 영화라... <카모메 식당>은 물론 <투스카니의 태양> 같은 영화도 소개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소개한 영화 대부분 내가 좋아하는 영화였다. 아워 테이스트 주인장은 카모메 식당의 '사치에'처럼 사람들을 보듬고 연대하며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좋은 사람들과 음식을 넘어선 라이프스타일로 다양한 문화를 공유하고 제안하면서 소박한 일상을 엮어가는 주인장의 삶에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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