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 푸시킨!
귀족학교 리체이에서 문학 수업뿐 아니라 사격술도 가르쳤다면 어땠을까?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푸시킨이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걸 알고 나서 읽게 된 시는 이전에 읽었던 시의 느낌과 사뭇 달랐다. 더 격하게, 더 아프게, 더 깊게 가슴에 파고들었으니까.
어려서부터 서재에 쌓여있는 책을 보며 성장한 푸시킨은 남다른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푸시킨은 12세에 집을 떠나 황실 가족 기숙학교인 리체이에 입학했다. 푸시킨은 학생 개개인을 존중하며 우애와 사랑, 배려를 목표로 삼았던 리체이의 정신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곳에서 푸시킨은 평탄하지 않을 그의 인생에서 큰 의지가 돼준 친구들과의 우정을 소중하게 쌓아나갔을 뿐만 아니라 100여 편이 넘는 시를 창작하며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져나갔다.
17세에 리체이 학교 승급 시험에서 자작시 <차르스코예 마을에서의 회상>을 낭송해서 선배 시인에게 극찬받았던 푸시킨을 리체이에 전시된 그림을 통해 만나볼 수 있었다. 리체이 졸업 후 3년간은 외무성 고급 룸펜으로 사교계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현명한 판단력을 잃지 않은 채 불온한 시를 쓴 정치범으로 두 차례 유배를 떠나기도 했다. 그즈음 시베리아 유형지에 처형당한 친구들을 생각하며 회한과 비애를 담아서 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에 당시의 심경을 잘 녹여냈다. 스파이들의 감시 속에서도 창작열을 불태웠고 민중의 삶을 체험하며 색다른 문학적 영감을 얻어 나갔다. 니콜라이 1세의 이기적인 자비로 자유로워진 듯했으나, 정부와의 대립과 불화로 감시가 더 심해졌고 그럼에도 창작의 시야를 더 확장해 나갔다.
푸시킨이 기거했던 녹색 방에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하며 행복했을 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전시된 푸시킨의 성적표도 봤는데 문학 쪽 성적은 우수했지만 관심 없는 과목의 성적은 형편없었다. 우열반을 가렸는지 우수한 학생은 앞자리, 열등한 학생은 뒷자리에 앉히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는 강의실에서 푸시킨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낭랑한 음색으로 자작시를 낭송하는 십 대 소년 푸시킨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십 대 때 쓴 시는 아니나 만국 공통 시처럼 느껴지는 이 시를 마음속으로 읊조리거나, 소리 내어 읽노라면 언제나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힘겹고 슬픈 삶에 조금씩 위로가 되는 시어들이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하다.
푸시킨의 말년은 극적인 상황의 연속이었다. 무도회에서 만난 나탈리야 곤차로바를 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열렬한 구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하지만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던 아내와 당테스의 염문설에 휩싸이자 푸시킨은 결투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푸시킨은 이틀 후 죽음을 준비해 온 사람처럼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결투로 허무하게 생을 마쳤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과 명예를 지키려고 했던 푸시킨의 결정은 필연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떠난 푸시킨의 천재적 재능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일까. 푸시킨의 작품은 엄격함과 열정, 사랑과 현실감이 조화를 이룬 하나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그 세계의 중심축은 사랑과 자유에 대한 열정이었으리라.
러시아 전역에는 푸시킨과 관련된 수많은 박물관과 기념관이 있다. 러시아 여행 중 직접 방문한 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리체이 귀족학교와 모스크바 푸시킨박물관, 아르바트에 위치한 신혼집박물관과 푸시킨미술관이다. 푸시킨 박물관은 하루종일 둘러보아도 다 못 볼 만큼 방대한 양의 전시관이었다. 각 전시실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사전 지식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럼에도 비교적 실제로 그려지던 풍경이 있었다. 가슴을 풀어헤친 채 책상 앞에서 펜대를 들고 생각에 잠겨있는 짙은 구레나룻에 검은 고수머리의 시인 푸시킨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 그런 풍경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박물관은 그 시대를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아르바이트 거리를 걷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푸른색 건물이 있다. 푸시킨이 총각파티를 하고 신혼시절 몇 개월을 살았던 신혼집박물관이다. 맞은편에는 푸시킨 부부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아르바트거리에 일주일간 머물 숙소를 정하고 매일 아침마다 푸시킨을 만났고 잠시 멈춰서 서성거리곤 했다. 어느 날 아침, 동상 앞에 누군가 놓고 간 보라색 꽃다발이 나를 불러 세웠다.
세 차례 러시아 여행을 다녀왔다. 원작 소설과 스크린으로 떠난 영화 관람까지 합치면 더 여러 차례 러시아를 여행한 셈이다. 한국에서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안톤 체호프의 팬들이 많다. 그러나 러시아 국민의 원탑은 단연 푸시킨이었다. 푸시킨과 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낸 상트페테르부르크 리체이를 방문했을 때 로컬 가이드의 설명을 듣다가 질문했다.
“러시아 국민에게 푸시킨은 어떤 존재인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번에
“전부”
라고 대답하더라.
푸시킨을 일컬어 '러시아 근대문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와 그의 존재감이 분명해졌던 순간이었다. 톨스토이는 시를 쓰고자 했지만 쓸 수 없음을 토로했고, 체호프는 장편소설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어려운 것을 다 해낸 푸시킨은 어려서부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소설, 산문, 드라마, 에세이, 평론 등 여러 장르를 섭렵하며 예술세계를 넓어나갔다.
훗날 도스토옙스키의 표현에 의하면 푸시킨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성'을 지닌 시인이었으며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란 칭호를 받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푸시킨을 탄생시킨 문학적 고향은 리체이 귀족학교였을까? 죽기 전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는 책들의 안식처인 '서재'였을까?
러시아 문학기행 보름 동안 푸시킨 광장 앞을 몇 번 오가고, 푸시킨 공원을 몇 번이나 산책했던가? 아침 풍경, 낮 풍경, 밤 풍경을 모두 찾아다니며 만났던 푸시킨 동상 앞에서의 시간이 이제는 아스라한 추억으로 자리매김했다.
푸시킨 광장 앞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카페 푸시킨이 있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 커피를 마시러 오는 여행객, 고퀄의 식사를 하기 위한 고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홀로 여행객인 나는 1인 좌석에 앉아 푸시킨을 추억하기에 딱 좋은 커피 한 잔을 주문한 채 푸시킨을 사유했다. 더러 나를 속여온, 혹은 속아준, 삶을 반추하며 질문하고 자답했다.
푸시킨 카페에서 어쭙잖은 시 한 편을 완성했다. 모스크바에서만 쓸 수 있는 시였다. 질문에 관한 시라고 할까? 제목은 '질문하는 지하철역'으로 정했다. 뜨거운 한여름 고급스러운 카페 푸시킨에서 한 편의 시를 끄적거렸다. 푸시킨에게 헌정할까. 받아주려나?
누군가 묻는다
여행이 뭐냐고
뭐 그런 질문이 있냐고 했다
누가 길 위에 쓰는 편지라 했나
여행은 곧 삶이다
삶이 여행이듯
여행은 질문이다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
내가 대답하고
다시 내가 질문하고
그 과정의 연속이 여행이다
지금 나
푸시킨스까야
계속 묻는다
체홉스까야?
끼옙스까야?
도스토옙스까야?
스몰렌스까야?
아르바츠까야?
뚜르게넵스까야?
깜싸몰스까야?
모스크바 전철역들이
계속 질문을 던진다
자문자답 자각
내 삶의 모토 그대로
모스크바에서의 하루는
질문의 늪
늪 속에 빠지거나
용케 헤쳐 나오거나
낯선 목소리
역시 질문하네
스꼴까?
역시 세상은 질문의 연속
해답을 찾기 위해
끝없는 질문은 필수
이제 다시 걷기
푸시킨 광장에서
답 찾고 또 질문하기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앞 '푸시킨 플라자'에 세워진 푸시킨 동상이다. 러시아의 스케일과는 다르게 아담한 동상이다. 서울에 푸시킨 동상이 세워지고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에는 박경리 동상이 세워졌다. 이 동상은 한·러 민간교류를 상징하는 표석으로 2013년에 세워졌다.
러시아 문학의 향기가 그리울 때는 러시아 문학을 읽거나 소공동으로 푸시킨을 만나러 가곤 한다. 푸시킨의 시에서 삶의 위로를 받은 날이라면 훌쩍 블루버스를 타고 소공동 나들이를 계획해 보라. 언제나 그곳에서 푸시킨은 삶에 지친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