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나를 찾아왔어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파블로 네루다에게 시가 찾아온 것처럼 내게 문학이 찾아왔다. 툭 던져지듯, 스며들듯, 나를 두드렸다. 혼자였던 시간이 많았던 십 대 시절, 문학은 학교 도서관에서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광수로부터 시작된 한국문학전집과의 만남이 내 문학 세계를 향한 첫 항해였다. 이후 러시아, 영국, 독일, 미국, 일본 등 여러 문학 작품 속에서 많은 인물들을 만났고 긴 시간이 흐른 후 깨달았다.
문학은 특별한 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문학은 그렇게 어려운 말을 쓰는 전문가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문학은 곧 인간 탐구라는 것을. 문학은 나의 이야기이자 너의 이야기이며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아주 심한 산후우울증에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 두 아이가 아주 어렸을 적, 엄마 손을 가장 많이 탔던 시절,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두 아이가 족쇄같이 느껴졌던 시절이었다. 1987년 봄. 작은 아이가 태어난 지 백일이 좀 지났을 때 큰 아이는 세 살이었다. 이대로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을 때, 작은 아이는 업고 큰 아이는 걸려서 그 당시 꽤 알려졌던 신경정신과 현관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상담이 시작됐지만, 쉽게 내 우울의 근원을 밝혀내지 못했다. 우울의 근원은커녕 내 가족사를 기록하는 데만 여념이 없었다. 그날 저녁, 꼭꼭 숨겨두었던 신경안정제 약 봉투를 싱크대 구석에서 발견한 남편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당신을 도울 수 있을까?"라고. 난 대답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해!"
그날 이후로, 신경정신과를 찾지 않았다. 남편의 세심한 배려로 서서히 우울증에서 벗어났다. 남편은 우선 주말에 일찍 귀가해서 두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에 나는 친구와 함께 연극이나 전시회를 보러 다녔으며, 조용한 도서관을 찾아서 대부분의 시간을 책 읽기에 빠졌다. 여러 나라의 작품들을 통해 비록 사각 공간인 책 속이었지만 각국을 여행하는듯한 이색적인 체험을 했다. 그 시절 내게 있어 진정한 상담자는 바로 문학이었다.
문학 속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났다. 세상에서 쉽게 경험할 수 없었던 다른 세상 속 인물들을 만나기도 했고,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유형의 인물들을 흥미롭게 살폈으며, 내 삶의 모습을 닮거나 혹은 내 주변 인물과 비슷한 이들을 보면 언어와 행동 패턴을 유심히 관찰해 나갔다. 또한 실제 삶에서 대처하기 힘들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 비슷한 문제를 작중 인물들은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동안 찾아 헤맸던 삶의 해답을 책 속에서 찾아내곤 했다. '아하 그때 내 정서가 이랬었구나. 그때 내 말이 그에게 상처가 됐겠구나. 그들이 그래서 그랬었구나. 그(그녀)가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라고 깨달았다. 문학이 건네는 값진 선물이었다.
책을 읽을 땐 그 안에 살게 된다. 읽고 있는 책이 내 심신을 달랠 수 있는 집이 되어줄 때 더없이 기쁘다.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기쁨이다. 완독 후 어김없이 나선 산책에서 또 다른 독서를 즐긴다. 산책은 길 위에서 자연경을 읽는 행위라고 누가 그랬던가? 길 위에서 읽은 책들에서의 지혜가 활자로 펼쳐지는 순간을 종종 경험한다. 나와 책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길도 책도 내겐 좋은 상담자다.
오래전 어느 강연에서 들었던 '죽은 것을 살게 하는 것이 문학의 힘'이라는 표현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많은 작품들이 거기에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평상시 말로 표현이 잘 안 되는, 혹은 말하고 싶지만 용기 부족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문학은 말할 수 있게 도와준다. 문학작품을 읽는 과정 자체가 왜, 어떻게 그렇게 되었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성찰하게 도우며, 정서적인 만남과 울림을 갖게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내가 문학과 친밀하게 지내는 이유이다.
땀과 먼지로 얼룩진 몸을 씻어내듯 마음도 목욕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책을 펼쳐 들고 근면한 독서인모드로 전환하라.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최은영의 삼대의 애증을 그린 『밝은 밤』과 중국 촌 동네를 가까이 만날 수 있는 모옌의 『중단편선』, 얽히고설킨 50인의 인간 군상을 만날 수 있는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다. 거실 테이블, 식탁 위, 화장실에 쉽게 펼쳐볼 수 있게 비치했다. 이제 내 마음을 오롯이 어루만지며 말을 걸어오는 작품 속 인물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