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책으로, 정원은 나무로
오랜만에 파주 헤이리로 향했다. 북스테이를 경험해 보고 싶다는 언니와 함께였다. 현관을 밀고 들어서자 흰 수염이 멋진 이안수 님이 직접 모티프원 활용법을 소상하게 알려주셨다.
모티프원은 "집은 책으로, 정원은 나무로" 채워지길 원하는 곳이다. 집안 곳곳에 자리한 책과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모티프원에서 내 삶의 '모티프'를 얻었다는 방문자의 고백이 모티프원의 가장 찬란한 찬사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혼자 모티프원을 찾는 것이 좋겠다. 자신과의 대화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니까.
체크인 후, 헤이리 주변을 산책하며 해가 기우는 것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백색 건물 뒤로 해가 질 때 빛과 그림자에서 찬 기운과 따뜻한 기운을 동시에 느껴볼 수 있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기우는 해를 감상할 수 있다는 자체가 감사했다. 내 마음이 느리니까 시간도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 느림의 기운이 그저 좋았다.
바람이 조금씩 차게 느껴질 즈음 강력한 냄새로 발걸음을 유인했던 베이커리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제대로 된 저녁식사를 할 것인가 가볍게 빵으로 식사를 대체할 것인가 고민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빵냄새의 승리였다. 몇 가지 종류의 빵을 품에 안고 오늘의 집 모티프원으로 귀가했다. 매일매일 다른 집으로 귀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자 아늑한 책의 집이 우리 자매를 감싸는 듯했다. 안온한 조도와 훈기가 서늘한 몸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얼마 전 선물 받은 와인을 개봉했고, 예상했던 것보다 취향에 맞는 맛과 향이라 기분이 업됐다. 쉬엄쉬엄 이야기를 나누며 대여섯 잔을 마셨다. 오랜만에 과음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흘렀고 자정이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다가 잠이 들었고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모티프원에서의 하룻밤을 이렇게 잠으로만 채우면 안 되지 싶어서 책장을 뒤적거렸다. 모티프원 주인장 이안수 님이 쓴 책을 발견했다. 몇 쪽만 읽고 자려고 했는데 책 속에 빠져들었다.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었다. '그냥 내버려 두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것. 그걸 작가는 '뜸이 드는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멍 때리거나 하늘을 쳐다보는 시간, 그저 눈을 감고 있거나, 일상과는 다른 여러 시간을 살아보는 것을 뜸이 드는 시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시간은 아무래도 함께 여행보다 홀로 여행일 때 제격이지, 뭐 그런 생각을 하며 뒤치락거리다 까무룩 다시 잠들었다. 달콤한 숙면을 취하진 못했지만 불면의 밤도 아니었다.
어김없이 아침은 밝았고, 새벽에 읽었던 문장이 마음에 머물고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 말없이 뜸이 드는 시간을 가져보자며 언니와 나는 느긋하게 서재에서 뜨끈한 국화차를 마셨다. 책으로 가득한 거실에서 나무로 채워진 정원을 바라보면서 무디어진 정신을 일깨워보았다.
늦은 감 있는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모티프원에서 알려준 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길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 아름다웠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 무르익어가는 가을을 넘치게 느꼈다. 맛있는 식사였다기보다는 그저 무난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동한 곳은 고전음악실 카메라타였다. 언니와의 완벽한 1박 2일 북스테이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