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슬픔을 위로하는 순간이 있다
1970년대 후반, 밤이면 어김없이 책 한 권과 라디오를 품고 이불속으로 숨어들던 여고 시절, 팝송에 빠져있던 여고생의 귀에, 어느 순간, 강렬하게 꽂힌 음악이 있었으니 바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다. 연주는 '파블로 카잘스'였다. 고전음악과 독대한 순간이다. 여고생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첼로 음색이라니. 이후 나는 파블로 카잘스의 연주로만 바흐를 듣고 싶어 했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얼마 전 강화도로 여행을 떠났다. 떠나기 전, 강화도에 갈 때면 항상 발걸음 하는 동검도 365 예술 극장 사이트를 검색하다가 파블로 카잘스의 <침묵>이라는 영화를 상영한다는 것을 알았다. 꼭 내 여행 일정에 맞게 파블로 카잘스와의 만남이 계획된 것 같았다. 소름이 돋았다. 곧바로 예약을 했다.
히틀러가 단 한 번만이라도 라이브로 듣고 싶어 했던 음악, 하지만 결국 들을 수 없었던 파블로 카잘스의 첼로! 요요마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거장 파블로 카잘스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던 영화를 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파시즘과 프랑코의 독재 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피레네산맥의 작은 마을 프라다에 칩거하며 공식적인 연주 활동을 중지하고 침묵했던 파블로 카잘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이민을 떠났지만 그는 끝까지 프라다에 머물면서 그의 민족 카탈로니아 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결국 카잘스의 침묵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한 예술가로서 세상의 타락과 변절을 막아보려는 작지만 거대한 몸짓임을 영화를 보며 깨닫게 되었다. 카잘스와 싱크로율 100%의 연기를 펼쳤던 존 페라의 열연에도 박수를 보냈다. 영화 엔딩 10분간 이어지는 파블로 카잘스의 실제 음악을 오마주 더빙한 장면은 잊지 못할 명장면이었다.
영화 관람 내내 2014년 몬세라트에서 그의 음악의 향기를 느꼈던 추억이 떠올랐고 카탈로니아 음악당 주변에서 그의 향기 나마 느껴보려고 배회하던 내 모습이 오버랩됐다.
이십 대 초반이었다.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인 줄 알면서도 다가가길 멈출 수 없었던 첫사랑, 한참 어른이었던 그 사람과의 이별이 예상됐던 공간. 80년대 초반 명동의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고전음악실, '에로이카', 그 사람과 헤어지기 위해 들어섰던 익숙한 공간, 그날따라 에로이카의 오렌지빛 실내가 그렇게 아프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에로이카 문을 밀고 들어서자 쇼팽의 즉흥환상곡이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쇼팽은 내 생애 최고의 슬픈 음악으로 등극했다. 이별을 고하기 전 쇼팽이 나를 이미 울려버렸다.
바다마을에 살던 그가 여전히 바다가 보이는 밴쿠버로 떠났고 20년이 한참 지난 어느 날, 홀로 밴쿠버 여행 중 디스틸러리 역사지구를 걸으며 혹시나 그와 마주치지 않을까 가슴 두근거렸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의 새로운 역사는 쓰이지 못한 채 그리움 가득한 마음을 안고 몬트리올로 향했다.
여자는 모름지기 스물넷을 넘기기 전에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야 된다는 부모의 지론에 강력한 거부감을 품은 채 살아왔지만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세뇌된 걸까? 24살, 나는 5월의 신부가 되었고 이듬해 허니문 베이비가 태어났고 또래 친구들이 사는 것처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아냈다.
7살, 5살 남매를 데리고 1991년 늦가을 덕수궁 산책을 나섰다. 시청역에서 전철을 내려 출구로 나가려는데 레코드점에서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음악이 흘렀다. 뭐지? 이 음악은? 아이들을 데리고 레코드점으로 들어섰다. 주인분께 지금 흐르는 곡명을 여쭈어보았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OST, A Love Idea란 곡이었다. 그 당시 그 음악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LP를 구입하고 다시 한번 듣길 원했더니 기꺼이 한 번 더 들려주셨다.
늦가을 덕수궁 돌담길엔 은행잎이 뒹굴고 있었고 바람은 적당히 싸늘했고, 음악은 내 마음에 수분을 잔뜩 채워 넣었지만 어린아이들은 돌담길을 마구 뛰어다니며 즐겁게 놀았다. 나, 잘 살고 있구나. 힘든 십 대 후반과 아픈 이십 대 초반을 잘 이겨냈구나. 지금 내 앞에서 사랑스럽게 뛰노는 아이들이 내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해 가을엔 구입해 온 LP로 무한 반복 A Love Idea를 듣고,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영화도 구해서 관람했다. 영화가 너무나 아프고 슬퍼서. 27세 Tralala의 삶이 너무 애처로워서. 관람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트랄라가 걸었던 20세기의 브루클린은 21세기에 뉴욕을 세 차례나 찾았지만 트랄라의 슬픈 운명을 느끼기엔 역부족인 브루클린으로 화려하게 변모해 있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 이후 클래식이 내 등짝을 후려치듯 정신 들게 했던 두 번째 음악은 바로 라흐마니노프였다.
피아노협주곡 1, 2, 3번 모두 좋아하지만 그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2번이라고 말할밖에. 바로 그 곡을 박재홍의 연주로 롯데콘서트홀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약 40여 분간 숨을 죽이고 그의 손끝에서 퍼져 나오는 러시아의 청백색 우울에 나를 그냥 몰아넣어버렸다. 아니 사로잡혔다고 표현하는 게 옮았다. 2019년 가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빠르게 차창을 지나쳤던 자작나무 숲을 내다보듯. 나는 피아노 선율에서 근원 모를 슬픔과 삶의 애환을 느끼면서 하마터면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세 차례 모스크바 여행을 할 때마다 푸시킨 동상 뒤로 펼쳐졌던 공원, 라흐마니노프 동상 앞에 서서, 그와 참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여고 때 그대를 만나게 된 배경, 그 당시 그대의 피아노 선율로 위로받았던 순간들이 많았음을. 감사와 고마움을 여러 차례 표현했고, 그의 긴 손가락에 내 손을 살짝 얹어보고 싶었지만 장신의 키인 그의 손에 내 손이 닿는 게 쉽지 않았다. 그저 그의 주위를 며칠간 맴돌았던 추억을 박재홍의 무대가 떠올리게 해 주었다. 고마웠다. 음악회는 언제나 옳다.
고전음악이 나를 구원하는 순간들이 있다. 슬픔이 슬픔을 위로하는 순간이 있다. 음악에서 그런 위로를 받을 때가 많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이 있다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이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좋은 때다. 지금 내 나이가 가장 좋다, 어느 시기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때 거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고 싶은 것 미루지 않는 게 내 삶의 모토이다. 지금 당장은 바흐를 듣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