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까치 Mar 28. 2024

오늘의 열 가지 장면 [27/365]

2024년 3월 27일, 22:45

한 번 느긋하게 걸어보지 못한 하루였다. 조금 전 출장 보고 메일을 보냈고, 이제야 종일 고대하던 일기의 시간이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눈꺼풀이 이미 천근만근이라, 의식의 흐름대로 하루를 복기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1.

오늘은 점심 운동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서 출장이 잡혀있었다. 운동을 마치고 바로 출발하면 문제 될 게 없었지만, 밥이 문제였다. 계획한 동선대로 착착 움직이면, 대충 15분 정도 밥 먹을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2.

선생님은 ‘오늘 좀 세게 해 볼까요’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2년간 단련하지 않은 엉덩이와 허벅지에 불이 붙었다. 그 불길이 얼마나 매섭던지, 운동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온몸이 휘청거렸다. 체육관을 나올 때 왼쪽 운동화 끈이 풀려있었지만, 쪼그리고 앉을 자신이 없어 내버려 뒀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정신을 집중해서, 밥 먹으러 잰걸음을 걸었다.


#3.

오늘의 메뉴는 아보카도연어덮밥. 빨리 나오고 빨리 먹을 수 있는 메뉴로 골라서, 구내식당으로 가는 길에 미리 주문을 해뒀다.


#4.

식당 앞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내 음식은 이미 나왔고, 그의 것은 아직이었다. 일단 마주 앉아 나는 먹고, 그는 안부를 말했다. 그는 나보다 몇 살인가 어린 입사 동기로, 인상이며 언어, 행동이 늘 편안한 사람이다. 비슷한 또래 아들을 키우고 있어 요즘 부쩍 연락이 잦았는데, 육아도 꼭 그 성격대로 힘들이지 않고 하는 것 같아 듣기가 좋았다. 그의 음식이 막 나왔을 때, 나는 자리를 떠야 했고, 그는 특유의 온화한 기색으로 말했다. “형 얼른가”


#5.

오늘의 목적지는 기상청. 예정한 시각에서 10분가량 늦게 출발했지만, 가는 길 상황이 나쁘지 않아 미팅 시간 전에 무사히 도착했다. 가는 길에 본 구로 거리는 여전히 갑갑했다.


#6.

기상청은 두 번째 방문인데, 올 때마다 좋은 느낌을 받는다. 공교롭게도 두 번 모두 화창한 날이었고, 청사가 너르고 푸른 공원 안에 위치해 있어, 건물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꼭 소풍 온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인상이 좋은 게 가장 큰 이유이긴 하다.


#7.

그간 다양한 부처 공무원 분들과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오늘 만나는 기상청 사람들은 조금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민간 못지않은 속도에, 희소한 전문성, 친절함과 겸손함, 무엇보다 사명감이 대단했다. 얼핏 봐도 '좋은 팀'이었다. 이 분들을 만난 이후로, 기상청이 어쩌고 하는 세간의 비아냥을 듣는 게 여간 불편해졌다. 이들에 대해서는 언젠가 자세하게 쓸 날이 있을 것 같다.


#8.

회의가 길어지는 바람에, 회사 복귀가 늦어졌다. 자연히 퇴근도 평소보다 늦어졌다. 요즘 부쩍 아빠를 찾는 아들이 보고 싶었고,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을 아내가 걱정됐다. 아보카도연어덮밥은 완전 연소된 지 오래라, 심한 허기도 올라왔다. 집을 향해 좀 요란하게 차를 몰았다. 미안합니다.


#9.

저녁 맘마를 다 먹은 아들이 소파에 누워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아빠 보고 싶었어? 하니, 응! 한다. 아빠도 종일 많이 보고 싶었어! 하니, 와서 폭 안아준다. 아내가 끓여준 된장찌개를 허겁지겁 먹고, 아들과 도와주세요 놀이를 한바탕 했다.


#10.

이상하게 정신이 하나 없고 피로한 날이었는데, 오늘 두 사람은 평온하고 행복해 보여서 고마웠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마음에 드는 봄 재킷도 두 개나 사줘서 더 고맙다고 말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