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정 양립’을 위한 서바이벌 연대기 ➁프리랜서
아이를 잉태한 이래 일곱 번의 이사를 거쳐 여덟 번째 집에 살고 있다. 그 사이 여섯 번을 이직하여 일곱 번째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11년 동안이나 이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유랑의 삶을 살게 된 까닭은 단 하나, 지금까지의 그 어떤 환경도 ‘일-가정 양립’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엉엉 울며 대기업 그만두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가족이 됐다
신입으로 입사해 4년 반을 보낸 첫 직장에 사표를 냈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진리를 망각한 채 욕심만 내던 ‘미친 텐션’의 삶을 접기로 한 까닭이다. ‘능력 있는 리더 + 죽이 잘 맞는 구성원 + 의욕 가득한 업무’라는 3콤보를 외면하고 돌아설 때의 감정은 우습게도 10대의 어느 날 ‘너무 사랑해서 이별하자’고 선언하던 때의 유치한 감정과 닮은꼴이었다.
온 얼굴이, 광대뼈와 턱관절과 치아 하나하나가 다 아플 정도로 몇 날 며칠을 울었다. 사회인으로서의 자아보다 엄마로서의 자아를 앞에 놓는 과정은 지독하게도 아팠다. 그럼에도 해야 했다. 아이는 커 가는데 언제까지 ‘90년대 아빠’ 포지션만 취할 수는 없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이 아이를 홀로 기르며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대안적 삶’을 꾸리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이 삶을 초기화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내 나이 스물아홉, 남은 인생은 길다. 지금 차분히 비워내고 충분히 숙고하여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주문을 걸고 또 걸었다. 내 아이만 빼고는 무엇이라도 버릴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상태로, 깔끔한 맨몸이 되어 엄마로서 서른 살을 맞이하겠다고 다짐했다. 빨리 가는 것보다는 어디로 가는지가, 어디로 가는지보다는 어떻게 가는지가 더 중요할 테니까.
"엄마 쥐거디 바떤네!"
퇴직 후 어린이집에서 나와 함께 하원 한지 채 한 달도 되지 않던 어느 날, 아이가 내게 건넨 첫 마디다.
“응? 뭐라고? 무슨 말이야? 천천히 다시 말해줘.”
줄잡아 열 번은 되묻고 나서야 나는 그 말을 해독해냈다.
“엄마 귀걸이 바뀌었네!”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나 들어오는 생계 부양자가 아닌, 일상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동반자로서의 엄마. 서로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우리. 아이가 네 살이 되고서야 비로소 한 가족이 된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테다.
일도 하고 애도 키울 수 있는 삶, '프리랜서'가 되기로 했다
제아무리 굳게 결심한들 대기업 시절의 텐션을 내려놓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었다. 비워낸 공간에 무언가를 채워야 한다는 조바심을 다스리는 데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됐다. 일주일에 한 번, 전부터 뜻을 두던 공부 모임에 나가는 일로 그 불안을 조금이나마 해소해보기로 했다.
공부를 마치고 버스 환승을 위해 서울 한복판을 지나는 길, 전 직장 앞을 지나는데 밖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보스와 동료들 몇몇을 마주쳤다. ‘다시는 엄마를 호출하지 않겠다’던 선언을 뒤로한 채 엄마에게 아이 하원을 부탁하고는 그립고 반가운 동료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보스는 뜻밖에도 내게 프리랜서(라 쓰고 ‘알바’라 읽는)로 업무를 대행해달라고 제안했다. 보수는 월 100만 원도 안 됐지만 대체로 집에서 근무하는 형태였고, 기존 업무와 크게 연속성은 없지만 나름 시야를 넓힐 기회였다.
첫째, 제삼자(주로 나의 엄마)의 노동력에 의존하지 않고 아이를 혼자 키울 수 있을 것
둘째, 보잘것없다만 나의 재능을 썩히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이바지할 것
셋째, 나와 아이가 배곯지 않을 만큼의 수입을 확보할 것
넷째, 그 와중에 나 개인의 행복과 미래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것
이 네 가지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대안적 삶이 눈앞에 그려졌다. 모두가 그런 삶은 불가능하다고 했고, 나의 선택이 무모하다고 뜯어말렸다. 나조차 엄청난 불안감에 휩싸였고 어떠한 확신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이 제안은 ‘안정적이거나 번듯한 직장이 없어도 다(多)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면서 살 수 있다’는 한 줄기 빛으로 다가왔다.
그 일을 위해 나는 을도 병도 아닌 ‘정’의 위치로 계약 후 업무에 투입됐다. 일하다 오줌 지린 이불을 빨아 널고, 일하다 쌀 씻고, 일하다 밥 안치고, 일하다 어린이집 전화 받아 달려 나가고, 일하다 장난감 치우고, 일하다 장 보고, 일하다 통장 들여다보고….
이게 다 멀티플레이어가 되는 과정이라 받아들이려 분투했지만 산만해지는 정신은 수습할 도리가 없었다. 사회인과 엄마로 분열된 자아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 역시 퇴사의 목적 중 하나였건만 이 일을 하느라 자아는 더 쪼개지고 말았다. 퇴사한 직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봤자 일에 하등 도움 될 것 없기에 가짜 이름에 가짜 신분으로 전화와 이메일로만 유령처럼 일했기 때문이다.
월 100만 원도 안 되는 벌이로 아이와 나 둘을 건사하기는 힘들었다. 잔고는 바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애당초 어린 나이에 벌어놓은 것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기 시작했으니 최후의 보루로 묻어둔 퇴직금 외에 생활비로 끌어 쓸 목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 가사를 돌보는 시간, 내 건강을 챙기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우리 가정은 빈곤해졌고 나는 사회복귀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갔다. 호기롭게 '내 몫도 네 몫도 제삼자의 몫도 다 혼자 할 수 있어! 나는 몇 개의 삶도 살아낼 수 있어!' 각오를 다졌건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외롭고 지치고 두려웠다.
사소하지만 온전히 책임져야만 하는 것들을 빠짐없이 혼자서 감당하는 삶, 아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책임지는 삶…. 의지하지 않으려 할수록 마음이라도 기댈 존재를 갈망했고, 오롯이 책임지려 할수록 그 무게에 질식해 버릴 것만 같았다. 어깨에 짊어진 모든 짐이 한없이 무거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럴 때면 창가에 앉아 혼자 만든 노랫말을 읊조리며 울었다.
“물에 젖은 이불 빨래를 널다가 그걸 뒤집어쓰고 울었어. 나귀야, 나귀야. 어리석은 나귀야. 소금을 지고 가랬더니 왜 넌 솜을 지고 있니.”
아이보다 ‘갑’이 먼저였던 ‘을’의 노동
이후로도 몇 번 불가피한 공백이 찾아왔다. 그럴 때면 남의 책, 남의 기사, 남의 기고, 남의 광고 문안…. 나는 대필의 역할을 맡은 철저한 ‘을’로 살며 단돈 얼마라도 벌곤 했다.
무더운 날이었다. 아이 학교 돌봄교실은 방학 중 오후 한 시까지만 운영했다. 그나마 내가 풀타임으로 근무하지 않는 시기와 아이 방학이 겹쳐 다행이었다. 이렇다 할 소득 없는 가장에게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한 중소기업에 임원으로 계시던 지인이 새 일을 제안하며 다급히 나를 호출하는 전화였다.
부리나케 아이를 차에 태웠다. 가는 길에 임시 돌봄을 위한 시설이 없나 검색과 전화를 거듭했지만 당장 가능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미팅 시간이 임박해왔다. 찾아보니 그 회사 건물에 대형서점이 있어 일단 그리로 내달렸다. 아이들이 앉아 책 보는 공간에 아이를 앉히고는 비치된 책을 있는 대로 집어 아이에게 안기며 말했다.
“엄마 정말 중요한 회의 있는 거 알지? 여기서 책 보고 놀고 있으면 한 시간 안에 올게. 절대로 아무 데도 가면 안 돼. 약속.”
헐레벌떡 회사에 오르니 땀이 온 얼굴과 목과 등을 적시고 있었다. 이 꼴로 첫 미팅이라니, 그냥 아이를 미팅에 데려오는 것이 피차 덜 부끄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를 호출하신 임원분과 접견하고, 회사 곳곳을 돌아보고, 직원들을 소개받아 인사하고, 업무 회의를 진행했다. 정말로 알아야 할 핵심은 우습지만 작은 방에 들어가 VR 기어를 쓴 채 설명 들어야 했다. 아이와 약속한 시각은 이미 지났다. 초조함과 불안감에 또다시 진땀이 났다.
‘혼자 잘 있을까? 이렇게 오래 있을 줄 알았으면 책을 더 집어다 놓는 건데. 다른 아이들은 다 부모랑 같이 있을 텐데 위축되겠지? 혹시 나 찾느라고 돌아다니다 길 잃는 거 아냐? 설마 누가 납치해가면 어쩌지? 지금 내가 이 우스운 기계를 쓰고 뭐 하는 거야. 돈 몇 푼 벌겠다고 애를 혼자 두다니 미친 거 아냐?’
불안은 꼬리를 물고 증폭됐다. 몇 분이라던 VR 콘텐츠는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헤드셋의 음향도 직원의 설명도 무엇 하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가를 둘러싼 기어 안에 눈물이 고였다. 기어를 벗으면 무슨 꼴이 되어 있을지 상상하기 싫었다. 첫 미팅이고 뭐고 차라리 화장하질 말걸 싶었다. 아니 차라리 양해를 구하고 아이를 데려올 걸 싶었다.
‘을이고 병이고 뭐고 나는 당당하게 업무 파트너로 왔는데, 갑자기 날 호출한 건 이쪽인데. 내가 없다면 피차 이쪽도 아쉬울 텐데. 살다 보면 아이 좀 데려올 수도 있지. 내가 왜 ‘을’병에 걸려서. 어쩌다 저자세가 몸에 배서. 어쩌다 노예근성에 젖어서. 도대체 왜 이렇게 매사 비굴하게 사는데!’
내 선택에 대한 자책과 이 상황에 대한 비관, 온갖 원망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미팅을 마치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무던 애를 썼다. 가장이라서.
정직하고도 불안정한 맨몸의 삶… 프리랜서·양육자
급여 노동자의 직장생활과는 정말 다르다. 직장에서도 언제나 ‘열일’했지만 사실 빠져나갈 구멍은 있었으니까. 미루거나 개기거나 잠시 쉬어가며 완급조절을 해도 월급은 꼬박꼬박 나왔다. 그 월급 벌어온다는 핑계로 야근해도, 외박해도, 내 몫의 돌봄노동을 등한시해도 이를 백업해줄 존재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스스로 하고 있다고 착각하기가 십상이다.
프리랜서에게는 정말 정직한 삶밖에 남지 않는다. 아이를 소홀히 돌보면 바로 티가 나고, 일을 게을리하면 바로 잘린다. 나와 아이의 균형, 가정과 일의 균형, 현실과 이상의 균형, 권리와 책임의 균형, 노동시장 속 나의 가치와 공동체 사회 속 나의 가치 간 균형을 스스로 조율해나가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균형 유지에 실패했다. 이후 다시 급여 노동자 행을 택하기도 돌봄 노동을 아웃소싱하기도 했다. 이건 경제적‧인적 자원이 척박한 극단적 케이스여서 그렇지, 많은 이들이 프리랜서 노동자 겸 양육자로서 저마다의 균형을 이루며 산다.
어쩌면 프리랜서 노동은 일과 가정의 ‘투잡’이 요구되는 양육자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일지 모른다. 장시간 노동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아이와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고용 안정성을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선택.
너른 좌표 위, 나와 아이가 어디에 치우쳐 있는가를 생각한다. 당장은 아니지만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며 산다. 균형을 이루진 못하더라도 균형점이 어디인지 의식할 수 있는 삶은 지독하게도 불안정한 맨몸의 과정이 내게 남긴 단 하나의 보상이다.
*칼럼니스트 송지현은 사회생활과 잉태를 거의 동시에 시작한 ‘11년차 워킹맘’이자 그동안 다섯 번을 이직(당)한 ‘프로 경력단절러’입니다. 한부모 가정의 가장으로서 2인분의 몫을 해야 하는 ‘시간빈곤자’이나 실상은 1인분, 아니 0.5인분조차도 할까 말까 하기에 스스로를 반쪽짜리 ‘파트타임 엄마’라 칭합니다. 신문방송학 전공 후 온갖 종류의 대필을 업으로 삼아왔지만 이번 연재를 통해 처음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쓰게 된 ‘생계형 글짓기 노동자’이기도 합니다.
*2020년 <베이비뉴스>에 기고한 칼럼을 브런치에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