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로마를 여행할 때도 그랬다.
그때 나는 '과거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진짜 타임머신을 타고, 꼭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과거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수천 년 전 건축물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곳, 과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을 여행한다면, 과거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로마에서 과거를 보았다.
로마와 비교하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과거를 간직한 곳.
동묘 시장 앞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날씨가 따뜻해서 유독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골목마다 수십 년 전 물건들과 현재의 물건들이 뒤섞이고, 혼재되어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것은 과거이기도 했고, 곧 현재이기도 하다.
옛날 지폐와 동전들, 기념주화들을 가득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나는 가게에서 질문을 잘 못하지만, 리까는 잘했다.
그는 10원짜리 옛날 동전을 하나 집어 들고 주인아저씨께 물어봤다.
"이건 얼마예요?"
"ㅇㅇ년도 발행한 거면 천 원~~"
10원이 천 원의 가치를 지닌다. 그것이 시간의 힘.
골목 중간중간 뭔가 먹을 수 있는 가게들이 숨어있다.
좀 돌아보다가 우리도 들러보자.
분위기가 좋다.
내가 나이가 들어 이런 곳이 좋아진 건지, 아니면 원래 좋아했던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중고 신발들도 여기저기 매대에서 잔뜩 팔고 있다.
운동화, 구두, 안전화, 전투화 가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신발이 모여있다.
나는 군용 물품에 관심이 많다.
IT회사의 일하는 방식은 군대의 그것과 같아야 한다고 지난 글에 쓰기도 했다.
보통 군인에게 요구되는 핵심 가치인, 'discipline'은 나의 일과 삶, 모든 곳을 관통하는 원칙이자 개념이다.
그런 나에게 동묘는 천국과도 같았다.
처음 보는 갖가지 군용 물품들이 가득했다.
옛날 카세트 플레이어부터 주크박스, 진공관 라디오.
결혼사진, 시계, 주전자, 행운의 잎사귀, 왕영은 씨 사진 등등
'없는 게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제대로 구경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니 조심하자.
옛 담배들도 판매 중이다.
'조선총독부(일제강점기) 담배(1920년)'를 팔고 있다.
리까가 사장님께 물었다.
"이거 피워도 되는 거예요?"
"향이 날아가서, 맛은 안 날 거야~"
정말. 재미있다 재미있어.
가게 사장님이었다.
앞에 보이는 스피커로 음악을 들어보라고 권하셔서 잠깐 서서 대화를 나눴다.
뭐 듣고 싶냐고 하시길래 ‘아무거나 좋습니다.’라고 답했다.
사장님은 리처드 막스의 'now and forever'를 틀어주셨다.
음질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작은 잡음이나 지직거림도 없는, 음원파일보다 깨끗한 소리에 감탄했다.
사장님은, 이런 오래된 스피커(1970년대 제작)도 잘 관리만 하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해 주셨다. 몇 마디만 나눠봐도 '고수'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나는 이런 분들과 대화하면 기분이 좋다. 자기 분야에서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표현하는 문장 하나하나마다 느껴지기 때문이다.
골목골목 신기한 물건들로 가득하다.
중고 옷가게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
가죽 자켓들이 스타일별로 잔뜩 걸려있다. 가격이 믿어지지 않게 싸다.
나는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니, 더 이상 옷을 들일 일은 없겠지만.
혹시 나중에 옷이 필요하다면 동묘를 꼭 방문할 생각이다.
finders keepers.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니지만, '찾은 사람이 임자'라는 뜻이 동묘와 어울린다.
여기서는 물건을 알아보는 안목이 중요하다. 쌓여있는 물건들 사이에서 '진짜'를 찾아내면 싼 가격에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한 분과 가게 주인아저씨 사이에 싸움이 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로 주먹다짐 하고 싶지 않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말로만 싸우셨다. 욕만 하셨는데. 'ㅆㅂ'이런 식의 유치한 욕이 아니었다. 문장으로 완성되는 욕. "눈X을 뽑아서 당구를 쳐버릴랑게." 같은 식이었다. 그 밖에도 다양한 욕을 구사하셨다. 한글을 이렇게도 사용하는구나 싶었다. 흥미롭다.
싸움을 피해서 이동하자는 내 말에, 리까가 말했다.
"이것도 보셔야죠. 저런 싸움도 동묘의 일부예요."
흠. 납득이 간다. 나는 리까에게 납득을 잘 당하는 편인가 보다.
카세트 테이프. 오랜만이다.
찾는 사람이 임자.
주방용품들이 많은 게 신기했다.
믹서기, 인덕션, 밥솥, 냄비, 전자레인지 등등 없는 게 없다.
인산인해.
나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한다.
하지만 여긴 어쩐지 나쁘지 않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옷이 쌓여있다.
고르는 놈이 임자.
다들 열심히 각자의 '보물'을 찾는다.
동묘가 왜 동묘인지 알아보자.
서울 동관왕묘(서울 東關王廟) 또는 동묘(東廟)는 대한민국에 있는 중국 촉나라의 장수 관우를 모신 관왕묘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다.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관우를 모신다고? 한번 들어가 보자.
정말 관우상이 있다.
확인완료.
비디오 테이프도 판다.
예전엔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하나에 천 원에 빌려보곤 했었는데.
이젠 비디도 플레이어 자체를 본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둘이 앉아서 슬램덩크 비디오를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일어섰다.
LP판.
여기도 고르는 게 임자.
보물 찾기로구나.
동묘에서 다이소는 살아남기 힘들 거다.
이미 동네 자체가 거대한 다이소다.
옛 포스터들도 좌판에 깔아놓고 팔고 계셨다.
과거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러니 과거로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혼식은 '쌀+보리'같이 섞어먹는 것, 분식은 '밀가루' 이런 건가. 잘 모르겠다.
많이 걷고, 많이 구경했다.
이제 우리도 뭐 좀 먹어보자.
느낌 좋은 가게에 들어갔다.
동묘에 왔으니 막걸리 마셔봐야지.
막걸리엔 파전이 진리.
파전에 막걸리 한 잔 하면서, 또 신나게 이야기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타임머신이 없어도 과거 구경이 가능하다.
70년, 80년, 가까이는 90년대까지.
영원히 잊혀진 시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서울 어디에선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곳 동묘는 단순히 '어르신들이 많은 곳'이라는 통념을 벗어던지고 즐기면, 오히려 힙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레트로 열풍과 함께 젊은 사람들도 많이 찾는다더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서울에 이런 곳이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신난다.
갈 곳이 이렇게나 많구나.
내가 모르는 곳이 많은 만큼, 앞으로 배우고 깨달을 것도 많겠지.
기대된다.
동묘 구경 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