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약국에서 방광염을 외치다!

episode-2018년 1월 12일

by 앤 셜리

베네치아에서의 아침 밝았다. 물의 도시라는 별명답게 어딜 봐도 물과 다리가 보인다. 무려 120개의 섬과 400개가 넘는 다리가 있다고 하니 정말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베네치아에 없는 것 하나! 베네치아엔 자동차가 없다. 모든 교통수단은 배다. Vaporetto라고 불리는 수상버스와 Motoscafi라는 수상택시가 있고 관광용으로 쓰이는 곤돌라가 있다.


우린 수상버스 1일권을 구입하고 아이유 뮤비 촬영지이자 인스타 핫플레이스인 부라노섬에 가기로 했다. 여긴 우리의 지하철 노선표처럼 수상버스 노선표가 있다. 노선도와 정류장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탈리아 말로 돼 있어서 엄청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리 복잡하진 않다. 지하철 환승하듯 수상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1시간여 만에 부라노섬에 도착했다. 알록달록 온 마을이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무지개색 옷을 입고 있다. 한마디로 예! 쁘! 다! 평소엔 관광객으로 넘쳐난다고 했으나 아침 일찍 출발한 덕분에 한가롭게 유유자적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날씨도 좋고 마을도 예쁘고 모든 것이 좋았다.


미친 듯이 사진을 찍어대다가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는데 이상하게 화장실이 자꾸 가고 싶다. 밥 먹기 전에 화장실에 갔다 왔는데도 뭔가 개운치가 않고 자꾸 소변이 마렵다. 아... 설마 방광염은 아니겠지? 몇 년 전 힘든 직장일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던 시기에 방광염에 걸린 적이 있어서 그 느낌을 아는데 왠지 불길하게도 그때와 증상이 비슷하다. 소변을 봐도 봐도 계속 가고 싶고 소변볼 때 타들어가는 통증이 있는데 딱 그 증상이 시작된 거다. 차라리 감기나 배탈이라면 몰라도 방광염이라면 이걸 대체 어쩐다니... 우리나라처럼 화장실이 흔한 것도 아니고 방광염이라면 항생제를 처방받아야 할 텐데 낯선 이 곳에서 어떻게 병원을 찾아가야 한단 말이니... 구글맵으로 병원을 찾아보니 베네치아에 한 군데 있긴 했다. 불안한 마음에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일단은 베네치아 본섬으로 향했다. 가는 수상버스에서도 화장실을 두 번이나 들락거리고 환승하는 정류장에서 수상버스를 기다리는 몇 분을 참지 못해 정류장 근처 카페에 뛰어들어가 친구들이 핫초코를 주문하는 사이 화장실을 다녀왔다. 친구들은 방광염이 아닐 거라고 위로하지만 난 안다...


원래는 수상버스를 타고 산 마르코 광장으로 가려고 했으나 내가 10분 이상 화장실을 참질 못하니 어딜 갈 수가 없어서 일단 호텔로 가기로 했다. 호텔 가는 길에 약국이 있어서 번역기로 '소변이 자주 마렵다. 방광염인 것 같다. 약을 달라'하니 파스 크기의 포장지에 분말 같은 작은 알갱이가 들어있는 약을 내밀며 이걸 물에 타 먹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한다. 방광염인데? 이런 알갱이를 물에 타 먹는다고? 전혀 믿음은 가지 않지만 방법이 없으니 호텔로 가서 물에 타 마셔본다. 약을 먹고 1시간 정도 누워있어 보기로 했는데 여전히 화장실은 가고 싶고... 이번 여행은 이대로 망하는 건가?...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나 때문에 친구들 여행까지 망칠 수는 없으니 친구들한테 너희들은 계획대로 산 마르코 광장에 다녀오라 했으나 어떻게 그러냐며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 같이 가보잖다. 까짓 거 소변이 급하면 유료화장실에 가면 되지 않겠냐며... 친구들의 성화에 호텔을 나서기는 했지만 채 10분이 되지 않아 또 신호가 온다. 도저히 안 되겠다... 좀 나아지면 따라가겠다고 친구들을 설득하고 혼자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 어찌나 멀고 서럽던지... 그 와중에 녹색 십자가가 보여 여긴 혹시 다를까 싶어 약국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항생제를 달라고 정확하게 말을 해봐야겠다. 번역기로 '소변이 자주 마렵다. 방광염인 것 같다. 항생제를 달라'라고 하니 이번엔 페니실린 비슷하게 쓰여 있는 알약을 준다. 뭔가 항생제 같다. 호텔로 돌아와 약을 일단 먹고 약 포장지에 쓰여있는 이탈리아 말을 번역기로 돌려보니 정확하진 않지만 항생제인 것 같다. 불안함을 달래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두 손을 배 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채 침대에 누워 항생제가 빨리 퍼지기를 기다려본다. 그런데 약을 먹은 지 30분이 지나자 화장실 가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 줄더니 2시간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거의 다 나은 것 같았다. 와~ 역시 항생제의 효과는 대단하구나! 친구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아까 아침에 봐 둔 호텔 옆 중국집에서 만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몸이 가벼워지니 마음도 덩달아 날아갈 것 같다. 친구들을 만나 짬뽕을 먹었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오늘이 베네치아 마지막 밤인데 이대로 보낼 순 없어서 야경이 예쁘다는 리알토 다리에 갔으나 겨울이라 그런지 수산시장도 문을 닫았고 생각보다 불빛이 많지 않아서 아쉬웠다. 방광염 때문에 베네치아에서의 한나절을 날려버린 점은 아쉽지만 그래도 병원에도 가지 않고 항생제로 치료가 됐으니(앞으로도 4일 동안을 약을 더 먹어야 해서 술을 못 마신다는 게 함정이지만...) 너무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참~ 우리 인생은 한치 앞을 모르는것 같다. 내가 베네치아에까지 와서 방광염에 걸릴 줄은...부끄러움도 잊은 채 오줌이 자꾸 마렵다고 낯선 이탈리아 약사에게 말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 산 마르코 성당, 탄식의 다리, 리알토 다리 풍경은 친구들이 찍은 사진으로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