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hum Sep 30. 2023

이미 죽은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

파리 미술관에서 느낀 창작가들의 예술혼 그리고 앙리 루소.

 파리에 있는 동안 미술관 몇 군데를 갔고 그 과정에서 많은 부분 생각의 변화가 생겼다. 특히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이 크게 마음에 남는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과 당시의 환경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비전공자로 컴퓨터를 사용해 그림을 시작한 나는 매번 전통 미술에 대한 거부감 혹은 성역시 되는 그 세계에 다가가는 일을 부담스럽게 여겼다. 그건 규율, 전통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일 수도 있고 과거 몇 번의 경험으로부터 축적된 트라우마 탓도 있을 것이다. 난 20대 시절 대부분을 회사생활을 하면서(돈을 벌면서) 그림을 그렸다. 다시 말해 성인이 되고서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만한 시간적 비용적 여유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설프게 전통의 방식을 좇기보단 원시적으로 나만의 길을 홀로 파는 것이 창작가로서 현 상황을 타파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믿어왔다. 지금도 그 생각을 완전히 놓았느냐고 하면 그렇지 않지만 그전까지의 나는 양옆의 시야를 눈가리개로 가린 말처럼 극단적 무지와 고집으로 내 길만을 응시하면서 창작을 해왔다. 그렇게 좁은 시야로만 내달리다 보니 당연히 불안한 마음도 내 안에 늘 잠재해 있었다. 그렇게 수년간을 살다가 서른이 넘어서야 전통미술의 도시 파리에 오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는 내가 파리에 온 이상 당연히 파리의 미술관들을 필수코스로 정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뮤지엄 패스나 추천 미술관들을 소개해줬다. 하지만 그 시기의 난 진로를 바꿀 생각까지 할 정도로 예술에 대한 마음이 닫혀가던 상태였고 파리에 온 목적은 그저 타국에서 살고 있는 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내내 먹고 자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빈 시간을 채울 뮤지엄 패스를 구입했던 것이다. '뻔할 거야, 그래도 그냥 한 번 가보지 뭐...'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며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미술관을 향했다.




오르세 미술관

친구 K를 오랜만에 만나고 우리는 오르세 미술관을 향했다. 내 생애 첫 파리 미술관이었다.


 처음 경험한 파리의 미술관은 역시 상상 이상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그림과 웅장한 공간에 압도되었다. 혼자 천천히 작품 감상을 하는 걸 즐기다 보니 친구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중간중간 등장해서는 귓속말로 "가방 훔쳐가지 못하게 조심해. 앞쪽으로 메"라고 말하고 친구는 유유히 사라졌다. 유명 작가의 작품 앞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린 사람은 이제 죽고 없지만, 그 작품은 시대를 넘어 다양한 연령과 국적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근사하게 여겨졌다.


 특히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 있어 가까이 가보니 그곳엔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화가 있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가서 가장 보고 싶었던 그림은 바로 고흐의 그림이었다. 도슨트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어로 그림에 대한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듣게 되는 테오를 향한 고흐의 편지는 작가가 얼마나 예민하고 기민하며 또 따뜻한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쉽게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현실에 부딪혀 불안과 자괴 속에 살면서도 끝까지 눈앞의 세상을 뜨거운 시선으로 응시하고 창조해 나가던 그의 찬란한 정신에 깊은 존경과 연민이 싹텄다. 살아생전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아보지 못한 작가의 그림. 그 앞에는 현재 인증샷을 위한 수많은 손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불공평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이 새삼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여유롭게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는데 친구가 급하게 다가와 말했다.

"이제 잠시 후에 폐장 시간이야! 한 시간도 안 남았어. 맨 위층에 모네의 그림이 있으니까 꼭 봐"


'아! 모네!'


 온갖 신기하고 진귀한 예술작품들에 정신이 팔려 시간이 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더군다나 모네의 그림이 위층에 몰려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짧은 시간 서둘러 그림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시험 전날 벼락치기 훈련 덕분일까... 시간이 긴박하면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되는 때가 있는데 이 날이 그랬다. 짧은 시간이 무척 야속하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지나치며 만났던 세잔, 고갱의 그림 앞에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구석구석 감상했다. 모네의 명작인 '파라솔을 든 여인'은 순식간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햇빛의 따사로움, 그림자의 서늘함, 냄새까지 자연스럽게 상상됐다. '나도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생각했다.



 폐장시간에 쫓겨 미술관을 뛰어다니다시피 하던 내 모습을 지금 떠올려보니 참 우습게 느껴진다. 난 정말 미술 감상을 진지하게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나도 그 그림 봤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어서였을까. 알 수 없다.


 이윽고 미술관 폐장시간이 가까웠다. 분주하게 미술관 끝까지 관람을 마칠 즈음 퇴장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검은 정장의 관계자들이 퇴장을 알리며 양치기처럼 관람객들을 천천히 출구 방향으로 몰았다.


퇴장하는 길 전시장 꼭대기에서 바라본 건너편의 몽마르트 언덕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여행 중에서 가장 마음에 오래 남은 미술관은 오랑주리 미술관이었다. 이날은 L누나와 함께였다. 그녀는 파리에 놀러 오는 손님들과 이 미술관에 몇 번을 왔지만 항상 그때마다 느낌이 다르다고 말했다. 첫날 오르세 미술관에서 압도될만한 유럽 미술의 전통과 규모의 힘을 느꼈다면 둘째 날 오랑주리 미술관에서는 근대 미술이 주는 편안함과 여유의 힘을 느꼈다. 특히 다른 미술관에 비해 과하게 작품수가 많지 않았고 관람의 균형이랄까. 흐름과 호흡이 좋았다. 1층 벽 전체를 두른 모네의 대작 수련은 미술을 감상한다는 느낌보다는 자연 속 정원에 들어와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자연광과 가운데 앉아 쉴 수 있는 벤치는 그 착각에 힘을 실어줬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히 감싸안는 것. 좋은 미술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클로드 모네의 대작 '수련'


 지하층에는 여러 인상주의, 근대 화가들의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 적당한 규모와 공간, 그에 알맞게 전시된 그림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림을 천천히 감상하고 있는데 L누나가 갑자기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루소를 나훔이가 좋아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다른 그림 쪽으로 이동했다.


앙리 루소의 '쥐니에 신부의 마차' (1908)


 다가가 보니 독특한 채색 방식과 구도, 인체 비율이 눈에 띄는 앙리 루소의 그림이 있었다. 이전에도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그의 작품을 유심히 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마주친 그림은 빨간 원피스를 입은 아이가 등장하는 '인형을 가진 아이'였다. 커다란 얼굴에 비해 자그마한 손, 어정쩡한 포즈의 다리, 묘한 표정...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림이었다. 흥미를 느낀 나는 서둘러 들고 있던 오디오가이드를 재생시켰고 천천히 그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앙리 루소

 루소는 세계 미술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이력을 자랑하는데 그 부분이 내가 가장 그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는 통행료를 징수하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그림을 그렸다. 하루 일과가 가만히 앉아 세금을 걷는 일이었던 이 말단 공무원은 묵묵히 자신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41세가 되던 해 공식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49세가 되어서야 세관 일을 그만두고 전업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시기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아마추어 화가, 일요(주말) 화가, 세관원이라며 비아냥댔다. 그럼에도 독학으로 미술을 하던 루소는 "자연보다 나은 스승은 없다"라고 말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그림 요소 대부분이 상상에서 끌어온 것이며 이국의 식물들은 프랑스 밖을 한 번도 나가지 못했던 그가 주변 식물원이나 책을 참고하여 그렸다는 것이다. 처음 전문가들은 루소의 그림은 비율이 맞지 않고, 구도도 엉터리라고 하며 그를 흠집 냈다. 그는 어떤 예술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 앞에 있던 그림 속 인물들과 풍경은 어딘지 그 비율이 제각각으로 보였고 그 전경이 내겐 몹시 개성 있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방식을 굽히지 않았고 끝내 기다려온 성공을 살아생전에 맛볼 수 있었다.


 그의 삶에서 커다란 위로와 동시에 전율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 닫혀가던 예술에 대한 내 마음이 다시금 열리기 시작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니, 사실 루소의 삶에서 발견한 것은 단순히 예술가가 가져야 할 태도라기보단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으로 가는 여정에 반드시 가져야 할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히 팽창해 나가는 발전 속에서 사람들은 원시적인 것이 나쁘다고 하지만 우릴 웃게 하는 행복의 근원은 결국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그 원시적인 흥미, 재미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미술이나 문학이나 그 모든 인간의 창작과 실험활동은 살면서 맞닦뜨리는 외적인 환경과 시선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발버둥 같은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루소는 자신이 추구하는 근원적인 삶을 위해 평생을 내달린 예술가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지금 난 루소의 이름을 들으면 노인의 모습이 떠오르기보단 겁 없이 내달리는 순수한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이내 마음이 두근거린다.


 피카소는 루소의 원초적이고 신비한 작품들을 보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그림이라고 했다. 이는 당시 피카소가 원시 민족을 다룬 그림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새로운 예술을 찾기 위해 잊으려고 노력했던 지식이 없는 그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루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술가는 더 이상 전통 안에 살지 않고, 각자 자신의 표현 방법을 창조해야 한다.

모든 근대 미술가는 자신만의 어휘를 A부터 Z까지 창조할 권리를 가진다."




  행복한 시간을 보낸 우리는 미술관을 나와 근방을 함께 걸었다. 앞에는 커다란 관람차가 있었다. 하늘을 나는 비둘기들이 보였고 덕분에 파란 하늘도 넓게 둘러보았다. 한 동안 전시의 여운이 마음에 남았다. 뜨겁게 살다가 떠난 예술가들의 열정의 불씨가 아주 작게나마 내 마음에도 옮겨 붙은 것만 같았다. 내 주위를 감싸는 이국적인 풍경과, 그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듯한 내 삶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난 무엇을 그렇게 눈치 보며 살아왔나.', '진짜 나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내게 주어진 삶의 사명이라는 것이 있을까?'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겹쳤다.


어쩌면 나는 이 혼란의 세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산 자들의 이야기보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그리다 떠난 죽은 자들의 이야기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전 07화 살아있길 잘한 거 같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