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hum Oct 07. 2023

고작 봄 햇살이 나를 치유한다고?

나도 나무와 풀 같은 작은 생명 중 하나일 뿐


 파리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암스테르담을 거쳐 런던에 갔다. 그곳에는 대학교 동창인 M이 살고 있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그녀는 2년 전 런던에 와 호텔에서 베이커리 일을 배우고 있었다. 처음엔 기술을 배우러 갔다가 경력이 쌓여 직원으로 뽑혀 일을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똘망똘망한 눈에 늘 자신감이 넘치는 친구였다. 처음 우리가 만났을 당시의 난 막 전역 후 복학을 하고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던 시기였다. 그에 비해 M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믿고 있었고, 항상 당당한 태도로 행동하는 친구였다. 나는 M에게 가끔씩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위로를 받았다. 같은 반이었던 우리는 제법 친해졌고, 나는 종종 농담반 진담반으로 "너는 나중에 진짜 성공할 거 같아"라고 M에게 말했다. 그럴 때면 그녀도 끄덕이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웃으며 말하곤 했다. 아쉽게도 졸업을 한 뒤로는 서로의 안부를 묻지 못했는데 다른 친구를 통해 M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너무 오랜만에 뜬금없는 나의 연락에 당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당시의 목표로 삼았던 나는 용기 내 M에게 연락을 했다. 나는 대충 암담한 당시의 내 상황을 전했고, M은 흔쾌히 런던으로 놀러 오라고 말했다. 마침 자신이 묵은 집의 주인이 여행을 가는 바람에 방 하나가 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주일간 그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거실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근황과 안부를 물었다. M은 벌써 런던생활 2년차에 접어들었고 곧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도 수년간의 근황을 전했다. 어떤 감정으로 유럽 땅을 밟게 되었는지 그리고 현재는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하소연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M에게 이런 하소연 밖에는 할 수 없는 건가'하고 슬픈 기분이 들었다. M은 학교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밝은 모습으로 대화에 임했다. 거창한 위로는 없었지만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위로가 될 수 있구나-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야 런던이 처음이지만 M도 그동안 너무 일만 하면서 시간을 보낸 탓에 런던을 제대로 즐긴 적이 많지 않다고 했다. 마침 그녀도 곧 퇴사를 앞두고 있었기에 우리는 런던을 함께 돌아다니기로 했다. 영국의 날씨는 변덕스럽기로 유명하다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내가 있는 동안 맑은 하늘을 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래도 참 오랜만에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여러 맛집, 디저트 가게를 방문했고 나와서 길을 걷다가 한 레코드샵에 들어갔다. 난 음악도 좋지만 특히 음반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서 레코드샵 구경을 좋아한다. 그날도 한참 공간을 구경하는데 눈앞에 신보음반을 미리 들어볼 수 있는 헤드폰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난 헤드폰을 쓰고는 1번 버튼을 눌러 무슨 음악인지 알 수 없는 그 음반을 듣기 시작했다. 잔잔한 통기타 반주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편안한 목소리의 음성이 흘러나왔는데 왠지 모르게 나는 그 음악에 매료되었다. 봄 햇살을 떠올리게 하는 따뜻한 음악이었다. 눈을 감고 듣다가 잠시 이곳이 어디인지도 망각할 만큼 깊이 몰입하게 되었다. 그때 M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는 사인을 보냈다. 난 헤드폰을 벗고 급하게 아티스트의 이름과 앨범 제목을 메모한 뒤 레코드샵을 나왔다. 




레코드 샵의 미리듣기 서비스


밖으로 나오자 비가 그치고 잔뜩 낀 구름 사이로 연한 햇살이 길가를 비췄다. 어딘지 초현실적인 그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봄이 오는구나!'하고 생각했다. 계속 조금 전 들었던 음악의 멜로디가 떠올랐다. 소박하고 서정적인 가사와 멜로디가 그 이후로도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때 들었던 노래는 Bonny Doon의 Long Wave라는 노래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혹독한 계절을 뚫고 있던 나에게 봄햇살 같던 당시의 그 노래는 정말 시의적절했다고 생각한다. 그 후로도 우리는 크고 근사한 전시장이나 레스토랑에도 갔지만 내게 런던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역시 그 레코드샵에서의 기억이다. 



 우리는 런던 여기저기를 이동하는 중에도 사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M에게 영어는 많이 늘었는지, 타지생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는지를 물었다. M은 당연히 어려움도 많았지만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이제 막 적응했는데 런던을 떠나는 이유가 뭐냐'는 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도 그와 같았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는 걸 알았어요.

좋은 사람이 있으면 그만큼 나쁘고 이상한 사람도 있죠.

그걸 확인했으니 돌아가는 거예요.

가서 열심히 살아야죠!'


그래, 어쩌면 우리의 세상살이는 그 어디에도 유토피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내가 그동안 있었던 곳, 앞으로 있어야 할 곳을 제대로 마주하고 이해하기 위해 낯선 미지의 세계를 갈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 밤. M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이 있어 먼저 외출을 한다고 하여 우리는 미리 작별인사를 나눴다. 다음날 아침, 나는 베를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거실 테이블 위에 M이 써놓은 엽서 한 장을 발견했다. 연필로 급하게 쓴 듯한 편지였다. 편지 말미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오빠!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요. 

앞으로 좋은 날도 분명 있을 거예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만날 때 웃으면서 만나요.'






 유럽에서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 내 친구들을 만나고 나는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전보다 훨씬 마음 상태가 좋아졌다. 계절은 벌써 4월이 되었다. 새소리가 들려 창밖을 열어보니 어느새 집 앞 앙상했던 나무에 연둣빛 잎사귀들이 잔뜩 달려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겨울을 관통하던 칼바람도 어느새 따뜻한 봄바람으로 바뀌어있었다. 난 창문을 양 옆으로 열어젖히고 그 앞 침대에 벌러덩 누워 창밖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런던 레코드샵에서 알게 된 Bonny Doon의 Long Wave를 크게 틀었다. 음악에 맞춰 흔들거리는 창문의 커튼을 보며 오랜만에 '정말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꼈고, 이내 '고작 이런 사소한 일에 행복감을 느끼다니'하고 스스로 놀랐다. 내게 필요한 건 봄이었을까? 나도 길거리, 들판 위에 피어있는 나무, 꽃, 풀처럼 그저 날씨와 계절에 울고 웃는 작은 생명 중 하나였던게 아니었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등한시했던 자연에 대한 동경의 시작은 아마 이때부터였다고 생각한다. 


 봄과 함께 다시 마음 한 구석엔 의욕이 싹트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어졌다. 장기적인 목표로 살기보단 우선 오늘을 제대로 살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독일어 어학원에 가서 4개월 기초 코스를 끊었다. 당장 이것이 어떤 쓸모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더 이상 매일매일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 어학원에서 받은 교재와 노트를 가방에 넣고 어학원을 향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봄기운 넘치는 세상은 눈부셨고, 동네 주민들도 하나같이 밝은 모습이었다. 난 마치 첫 유치원에 등원을 하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두려움보단 설렘이 가득했다. 규칙적인 일정 하나가 생기니 그 이후의 내 일상의 톱니바퀴도 천천히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베를린의 봄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집 앞에서 봤던 연두빛 나무들


집 앞 공원 (베를린)





내게 봄날의 행복을 안겨준 앨범 'Long wave'



이전 08화 이미 죽은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