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 나잇값을 벗어던진 자유인이 되고파
우리나라만큼 자신과 타인의 나이에 심하게 의식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살아가면서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살아간 지 몇 해째인지 세어보는 일 자체는 어쩌면 국적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나이가 타인과의 관계(서열)라던지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을 가늠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다. 누가 위고 아래냐에 따라 지칭하는 단어도 사용하는 어투, 심지어 권리조차도 갈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섯 살짜리 꼬마부터 여든 살 노인까지 조금만 관계 속에서 다툼의 여지가 생기면 "너 몇 살이야?"라는 말부터 날아간다. '취업은 언제냐', '시집, 장가 안 가냐', '아이는 안 낳냐',
'요즘 얼마나 버냐' 등... 우리가 질색하는 오지랖 섞인 질문들의 큰 기준도 결국 나이가 된다. 물론 일상 속 존댓말이나 누군가를 배려하는 아름다운 경어는 듣기 좋고 아름다운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이기에 오래도록 계승될... 그리고 계승될 수밖에 없는 고유한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할 아랫사람들의 억눌린 권리나 철든 어른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하는 윗사람들의 감정을 떠올려보면 사회 깊숙이 파고든 군대식 서열 문화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수직적 소통방식을 더 공고하게 만드는 것 또한 이 '나잇값' 문화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갑자기 나이 혹은 나잇값에 대해 열을 올려 이야기하는 이유는 나의 독일 생활에서 자유를 얻은 기분을 느꼈던 것이 바로 이 나잇값으로부터의 해방 덕분이기 때문이다.
어학원에 가기 전, 나는 여러 생각을 했는데 그중 가장 먼저 했던 다짐 하나가 있다. 그것은 ‘남들 눈치 보지 말고 자신감을 갖고 행동하자’는 것이었다. 처음이니 모르는 것은 당연하고 질문이 생길 땐 속으로 삼키지 말고 전부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목소리도 크고 당당하게 내기로 했다. 또한 맨 앞자리에 앉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곳에서 나의 사회적 위치는 걸음마를 막 시작한 아이와도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된 이상 태도만이라도 왕처럼 행동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깨도 척추도 펴고 걸을 때도 당당히 걸으면 지켜보는 사람도 더 긍정적으로 나를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어도 못 하는데 재미도 감동도 없는 미적지근한 동양인 학생으로 비치고 싶지 않았다.
독일어 A1(기초반) 수업에는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브라질, 콜롬비아, 페루, 탄자니아 등...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있었다. 아시아 사람은 나뿐이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이런 다양한 대륙, 인종의 친구들을 한 공간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우린 독일어 인사인 "Hallo(할로)"를 외치며 인사를 나눴다. 계획대로 나는 매일 맨 앞 좌석에 앉아 선생님을 바라보았고 하고 싶은 말을 맘껏 뱉었다. 알파벳부터 시작한 정말 완전 기초 수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손짓, 몸짓으로 얼마나 하고 싶은 얘기들을 맘대로 떠들어댔는지 돌이켜보면 지금도 놀랍다. 예전부터 스페인, 이탈리아 사람들이 우리나라와 정서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실제로 수업 중에 사귄 이탈리아 친구 Vincezo가 그랬다. 그는 매우 활발한 성격으로 나와 많은 부분에서 통했다. 우리의 개그 코드는 굳이 문장으로 만들어 뱉지 하지 않아도 충분히 표정이나 간단한 단어로도 통했다. 그 사실이 무척 놀라웠고 또 즐거웠다. 어느덧 우린 독일어 기초반의 분위기메이커가 되었고 또 친한 사이가 되었다. 한 가지 놀라웠던 점은, 수업을 하는 내내 우리 구성원들이 서로의 나이를 전혀 궁금해하지도 않고 묻지 않은 채로 몇 개월을 지냈다는 사실이다. 물론 존댓말이 있는 한국에 비해 초면부터 나이를 묻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예상을 했지만 몇 개월이 되도록 서로의 나이를 전혀 묻지 않는다는 사실은 조금 놀랍게 여겨졌다. 어쩌면 그 사실 때문에 난 그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로 아이처럼 수업을 즐길 수 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틀리든 말든 자신 있게 엉망인 독일어를 내뱉었고 그렇게 무작정 내뱉으는 것이 외국어를 최대한 빨리 습득하는 방법이라 여겼다. 그 덕분에 독일어 실력과는 무관하게 어학원 친구들과 자주 소통할 수 있었고 더 가까워졌다. 역시 중요한 건 열린 태도와 마음이구나-하고 나는 그때 깊이 실감했다. 선생님인 Mira 또한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가 엉뚱한 질문이나 답변을 해도 늘 밝은 표정으로 진심을 다해 응해주었다. 대단한 이야기가 오가지 않더라도 사소한 일들로 재미와 웃음이 가득한 수업 분위기가 참 좋았다. 봄 햇살에 흔들거리는 교실 밖 창문의 풍경도 나를 행복하게 했다. 이런 열린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난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경험을 짧게나마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어느 날, 평소처럼 어학원 교실에 들어가니 젊은 동양인 여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얼핏 봐선 한국인으로 보였고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친구 같았다. 우리가 인사를 채 나누기도 전, 이탈리아 친구와 콜롬비아 친구는 유난을 떨며 "한국에서 너의 친구가 왔어!"라고 말하며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들의 눈엔 우리의 나이 차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나와 같은 나라에 이성이 같은 반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내가 몹시 기뻤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난 소란스러운 아이들 사이로 지나가 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묘한 분위기에 어색함을 느끼며 먼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내가 처음 독일어 수업에 들어왔을 때 한국인이 없길 바랐던 것처럼, 그녀도 자국 사람을 어학원에서 만나는 것이 어쩌면 유쾌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생각을 했지만 어쨌든 반가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가. 이 어학원에 먼저 적응을 했고 나이도 내 쪽이 훨씬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나름대로 긴장했을 친구에게 넉살 좋게 다가가 대화를 걸었다. 우린 서로 독일에 온 지 얼마나 됐고,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지에 대해 간단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는 묻지도 않은 나의 한국식 나이를 먼저 이야기하고 말았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서열 정리나 대화의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대화의 흐름이 그렇게 흘러가버렸다. 내 예상대로 우리의 나이는 열 살 가까이 차이가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일이 잘못됐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내가 문제를 직감했던 것은 바로 수업을 시작한 뒤부터였다.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 선생님의 주도하에 질문을 주고받으며 수업이 진행됐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매 수업마다 마구 떠들어대던 내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내 난 그렇게 된 이유가 바로 건너편에 앉아있는 한국 학생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엄연히 말하면 '내 신상을 알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이 저기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 나 자신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에 '이상한 독일어를 하는 주제에 큰 목소리로 철없이 떠드는 아저씨'로 나 자신이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싹튼 것이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나는 스스로 '나잇값'을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친구들과 선생님은 내게 혹시 어디가 아프냐며 이전과 수업 태도가 달라진 나를 걱정했다. 나도 도무지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토록 예민하고 나약한 나 자신에게 무력감을 느꼈다. 임시반 배정을 받았던 그 학생은 이후 다른 기초반에 정식으로 배정되었고 나는 다시 평소와 같은 태도로 수업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날의 경험으로 스스로가 얼마나 주변 사람들과 주변 환경에 쉽게 지배되는 인간인지, 또 베를린에 와 느끼게 된 낯섦과 이방인으로서의 지위가 얼마나 나를 원시적인 한 인간으로 자유롭게 만들어주는지를 깨달았다. 지금은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줏대 없는 한 인간일 뿐이지만 언젠가 내 삶의 방향이 명확해지고 올바른 자존감이 확립된다면, 그땐 무엇에도 영향받지 않고 온전한 자유인으로 나답게 살아갈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