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의 특성과 내가 가야 할 길
베를린에서 지내는 동안 내 정서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학교나 진학과 같은 목표는 없었지만 어학원을 끊고 하루하루 나름의 목적을 갖고 살다 보니 삶의 바퀴가 천천히라도 굴러가게 되었다. 학원, 집을 오가는 매우 단순한 패턴이었지만 그 사이에 친구를 만나거나 하는 일들도 더러 있었다. 처음 독일에 올 땐 창작하는 것을 그만두고 뭔가 기술이라도 배우자는 생각도 하고 왔었지만 마음이 조금씩 치유되니 다시 창작에 대한 불씨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챙겨 온 태블릿과 노트북으로 그림을 그렸고 또 순간순간의 기분, 생각들을 적어 온라인에 기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한국에서 메일 하나가 와있었다. 열어보니 작업의뢰 메일이었다. 제법 큰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하루하루 모아놓은 돈을 소모하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함이 있었는데 마침 정말 기쁜 소식이 도착한 것이다. 독일과 한국의 일과시간이 겹치는 순간 화상회의를 했기 때문에 시차는 생각보다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학원을 가기 전과 후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큰 프로젝트 하나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전부터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한 적은 있지만 막상 실제로 타국에서 어학원을 다니며 프리랜서 일을 병행해 보니 '정말 좋은 세상에 살고 있구나' 하고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 그전까지는 갖고 있는 돈을 최대한 아껴 쓰자는 생각에 지출을 할 때마다 가계부에 적고 있었다. (난 정말이지 평소 이런 걸 기록하는 성격이 아니다.) 독일의 식료품 물가는 꽤 안정적이어서 생활에 불안한 마음은 덜했지만 어쨌든 얼마나 이곳에 체류할지 모르는 상황에 심리적 압박은 제법 있었다. 어쨌거나 타국에서 일 하나가 들어왔다는 사실은 사회초년생 시절, 처음으로 프리랜서 일이 들어온 것만큼이나 기쁜 사건이었다. 놀랍게도 이후로 몇 건의 일이 더 들어왔다. 그렇게 한 해를 돌아보니 독일에서의 생활비는 그 해 나의 프리랜서 일로 모두 충당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어학원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은 방에서 보내거나 산책을 하면서 보냈다. 룸메이트 친구는 놀 곳 갈 곳 많은 베를린에 살면서도 집에만 처박혀 있는 나를 보며 “형은 누구한테 베를린에서 살았다고 말하면 안 돼~”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나 나름대로의 핑계를 대자면 여전히 나는 외부보다는 내 내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조금 식상한 말 같지만 당시 내가 심취되었던 것은 바로 독서였다. 난 어릴 때부터 그다지 독서에 취미를 두지 않았다. 두껍고 작은 글씨를 들여다보면 잠부터 쏟아지는 그런 유형의 학생이었던 것이다. 책을 딱 들어 올려 펼쳤을 때 그림이 있는 책인지 확인하고 없으면 휙 덮어버렸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쨌든 그렇게 독서와는 담을 쌓고 지내던 내가 생사의 갈림길 속에서는 결국 책에 기대게 되었다. 한정된 나의 주변사람들에게 인생의 깊은 고민을 말하기엔 그들과 나 사이에 공감대가 적었고 그들에겐 그만한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모두 눈앞의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해 나가기에도 하루가 벅차보였다. 그 냉혹한 현실이 나로선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어디에 기댈지 알 수 없었던 시기, 우연한 계기로 접한 책 몇 권이 내 마음에 큰 치유가 되었다. 당시 나는 전자책으로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아이폰 어플리케이션으로 간편하게 책을 다운받을 수 있었고,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아서 내가 원하는 책은 신권이든 구권이든 어렵지 않게 전자책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특히 동시대의 작가들보다 이미 세상을 떠난 고인들의 작품들이 내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예술가로 살 수 있도록 나를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릴케, 니체, 고흐, 괴테, 오스카 와일드 등... 평소 이름만 들어보고 그 삶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인물들의 이야기에 깊이 심취되었다. 결과적으로 혹은 겉으론 화려해 보이지만 그 수면 아래의 과정 속에는 모두가 심각했고 또 매우 깊이 고뇌하고 있었다. 그들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 마음은 서서히 치유가 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인생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있었고, 또한 지금의 나처럼 위대한 인생의 선배들을 통하여 나름의 답을 찾아가고 있었다. 지금 내가 하는 답 없는 방황이 자괴감을 가질 일이 아니라 반드시 성숙한 인간으로 가기 위해 밟아야 할 필수절차라는 것도 그 시기에 깨닫게 된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생각의 불순물들을 걸러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 책들을 읽어나갈수록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커다란 산들 중 하나가 천천히 치워지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내 인생 본질의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안하고 위험해 보일지라도 온전히 나의 생각과 철학을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만들어가야 할 예술가의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설령 물질적인 성공과 거리가 멀지라도 그건 일종의 숙명이라는 확신이 든 것이다.
도구만 있다면 어디에서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 내가 가야 할 길의 방향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차 나의 자존감 또한 회복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 시기, 특히 내 가슴에 깊게 자리 잡은 것은 헤르만 헤세의 시집에 있는 짧은 글귀였다.
'난 국토가 없는 왕이다.'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베를린 생활은 경제적인 부분에서 기대 이상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땐 늘 물음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벌써 반년정도 남은 상태였고 나는 그다음 계획에 대해 어느 정도는 가닥을 잡을 필요성을 느꼈다. 독일생활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자유분방한 사람들, 자연친화적인 도시의 분위기가 정말 나에게 잘 맞았다. 특히 독일에 더 있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은 학교를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내 마음에 싹텄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사람 위주가 아니라 학생 위주로 흘러가는 독일식 교육에 나는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동안 비전공자로서 원시적으로 체득한 예술활동을 멈추고 이곳에서 정식으로 예술 교육과정을 받는다면 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동시에 내 머릿속엔 한국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불안한 마음으로 날 지켜보던 가족들, 특히 여자친구에게는 3개월 정도만 여행을 하다가 돌아오겠다고 했건만… 귀국 날짜는 점점 미뤄지고 있었다. 무탈하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다가도 가슴 한 구석에서는 그런 생각들이 꼬리처럼 따라다녔다. 소중한 관계와 새로운 모험 사이에서 나는 갈등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어학원 4개월 코스가 마무리될 무렵, 나는 가족들에게 생존신고 겸 새로운 계획을 이야기하기 위해 한국에 잠시 다녀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