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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hum Nov 25. 2023

왜 안돼? /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자

다시 살아난 자존감, 뜻밖의 베를린 전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나머지 반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많은 부분에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베를린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을 여기에 나열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지 알 수 없다. 그만큼 무수한 경험들을 비처럼 맞으며 나는 나 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었고 또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베를린에서의 일들을 그저 안에서 바깥으로, 즉 익숙한 것에서 새로운 것들을 바라보는 관점으로만 모든 것들을 사유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모든 것들이 정반대의 일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나는 잠시 익숙한 나의 터전을 떠남으로 내가 태어나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우리나라의 정서적 특성을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한 구성원으로 아둥바둥 살아가고 있던 나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고 정의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던 나는 눈을 뜨고 살아가고 있지만 어딘지 죽은 채로 많은 시간을 흘러 보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 자신의 기준보단 불가능하거나 도달하기 어려운 평균을 정해놓고 그것을 표준이라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나 또한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에 내 행복의 기준을 맞추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여겼고 결국 그 스트레스는 이상한 곳에서 터져버린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남부럽지 않게' 혹은 '남들 만큼만'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불가능한 강박을 꿈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품고 있었고, 남과 다른 삶의 방향은 유난스럽거나 매우 비참한 일이라고 여기기 까지 했다. 하지만 나란 인간의 본질은 텅 비어있었다. 진짜 나란 인간이 필요로 하는 삶의 동력은 무엇일까? 나란 사람이 바로서기 위한 최소의 유지비는 얼마일까?와 같은 질문들이 머릿속에 다시 던져졌다. 몇 번의 질문과 답을 거치니 혼탁했던 시야가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창작을 향한 내 마음도 다시 활짝 열리게 되었다. 진짜 비참한 게 무엇인지. 어떤 것이 사람답게 매일매일을 값지게 살아내는 것인지를 맑은 눈으로 응시하게 된 시기였다.


 베를린에서 만난 친구들 대부분은 학업을 준비 중이었고 나도 독일 교육에 호기심이 쌓여가던 중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난 한국으로 돌아가서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아'라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난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처럼 내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좀 더 다양한 장르의 작품도 제작하고 싶었다. 이방인으로 살면서 느꼈던 오묘하고도 복합적인 지금의 감정들을 다양한 시각물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심도 싹텄다. 다시 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나답게 삶을 꾸려보자는 용기와 확신이 생겼다. 내 인생의 길잡이는 오직 나 자신 뿐이라는 높은 자존감의 책 속 예술가, 문학가들의 조언 또한 내 태도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게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일 년 동안 비워두었던 서울의 집을 정리하고 진짜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나답게 뿌리내릴만한 곳을 물색해 보자고 생각했다.



 그 무렵 내 작업을 흥미롭게 봐준 분에게 감사한 기회를 얻게 되기도 했다. 베를린에서 작은 갤러리 겸 카페를 운영하는 분이셨는데 연말에 전시를 열어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베를린에 있는 동안 그렸던 그림들을 전시할 수 있었고 베를린에서 인연을 맺게 된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담한 공간이지만 나로선 타국에서 열어보는 첫 전시였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전시 제목은 'Warum nicht? (왜 안돼?)'였다. 그 말은 어학원에서 내가 수업 중 실수로 엉뚱한 소릴 할 때마다 어학원 선생님이 자상하게 웃으며 건네주던 말이었고, 내가 앞으로 몇 번이고 모험의 두려움 앞에 섰을 때 되뇌어야 할 말이기도 했다.


전시 오프닝을 앞두고 베를린 구석구석에 홍보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끝내 행복한 감정으로 하루를 마감했던 그날의 기록을 아래에 공유해 본다.





2018년 12월 13일


혼자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자신했지만. 막상 전시 포스터, 초대장, 테이프, 칼을 들고 집 밖을 나서자, 스스로의 막연함에 급 두려워졌다. 도대체 어디를 가야 하며 또 초대장을 비치하려면 어떻게 부탁해야 하는가. 가는 길에 마주친 벽면에 깔끔한 포스터들은 전부 업체에 맡긴 유료홍보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감정은 더더욱 커졌다. 최악의 경우 챙겨 온 것들을 전부 집으로 가져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베를린에 오래 산 친구분께 ‘여기 포스터를 붙여도 괜찮나요?’라는 말과 ‘여기 엽서를 놔도 괜찮나요?’라는 말을 독일어로 알려달라고 해서 열심히 외웠다. 입에 붙도록... 한 공사장 근처 벽면에 포스터 부착을 허락받기 위해 간이사무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준비한 대사를 어버버 읊었다. 직원은 귀찮다는 듯이 맘대로 하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렇게 몇 장의 포스터를 붙이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너무 긴장한 탓에 ‘포스터를 붙여도 되냐’는 말을 ‘엽서를 비치해 놔도 되냐’는 말로 잘못말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스스로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빌려줬던 책을 받을 일이 있어 카페에서 동생 은총이를 잠시 만났다. 이래저래 하소연을 했더니 뭐 그리 겁을 먹냐며 같이 가주겠다고 말했다. 정말 힘이 났다. 그리고 그 후로는 트람이 다니는 대로변 전봇대에서부터 정류장 근처 벽면 여기저기 열심히 포스터를 붙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법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벌금을 물어주는 쪽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미래의 나’라는 심정으로... 아니 그보다 가만 보니 유료광고물 위치를 제외하고는 모든 홍보물이 자유로운 위치에 제멋대로 붙여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됐다. 이런 말은 그렇지만. 나름 상도를 지키기 위해 날짜가 지난 포스터 위에만 포스터를 붙였다. 그렇게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에 하나하나 붙이다 보니 이제 정말 베를린 안에서 내가 살고 있구나 싶은 새삼스럽고 웃긴 실감이 들었다. 얼마 전 알게 된 베를린의 한식 레스토랑에 가서 관계자 분들께 초대장을 드렸다. 포스터도 있으면 달라고 하셨고 가게에 붙여주겠다 말하셨다. 심지어 많은 동료 지인분들에게도 전달해 주시겠다고... 정말 감사했다. 그렇게 식당을 나와서 내가 평소 꼭 붙이고 싶었던 공간에 가서도 포스터를 세 개 정도 이어 붙였다. 사실 한 장의 포스터도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럼에도 왠지 내 그림의 포스터를 세장이상 베를린의 이 벽면에 꼭 붙여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도움을 받으며 포스터를 하나하나 붙이는데 뒤에 지나가던 한 남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왜 안 돼(Warum nicht)’ 글자를 가만히 보고 웃더니 “Why not!”외치고 웃으며 걸어갔다. 뭔가 그런 작은 반응도 흥미롭다고 생각하며 계속 붙였다. 실수로 내려놓은 포스터를 밟아버려 맨 위의 한 장을 뒤로 빼버리고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자 백팩을 메고 있던 한 노인이 가만히 떨어진 포스터를 내려다보더니 사진을 찍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다. 그러자 본인은 프랑스 니스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사람이라면서 내 홈페이지 주소를 물어봤다. 이럴 수가. 우리는 서로 초대장과 명함을 교환했다. 프랑스의 갤러리가 나와 연을 맺을 확률은 희박하지만, 우연히 포스터를 붙이다가 해외의 미술관계자와 명함을 주고받았다는 그 자체가 내게는 실로 기적 같고 값진 경험이었다. 같은 시각 한 커플 중의 여자가 포스터의 한글을 보고는 “안녕하세요!”라고 우리에게 인사했다. 놀래서 돌아보니 자신은 한국, 독일 부모님을 뒀다며 독일어로 자신을 설명했다. 그 커플에게도 초대장을 나눠줬다. 또 지나가는 외국인 친구들이 “안녕하세요!”를 외치면서 지나가기도 했다. 10분도 되지 않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사실 베를린에 와서는 한국어를 활용한 작품활동은 일절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해를 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되려 이런 이색적인 글자의 비주얼과 나 자신의 사고가 그들에겐 더 흥미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내가 베를린에 오기 전부터 나의 정신적 지주인 진욱이 형과 진희누나의 집에서 따뜻한 국과 해물전으로 몸을 녹였다. 영광스럽게도 포스터와 초대장에 내 사인을 받아주셨다. 주제넘게 사인을 할 때마다 진심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느낀다. 감사한 분들이 너무 많다. 결과적으로 30장의 포스터와 80장 남짓의 초대장을 가지고 나왔는데 둘 다 거의 소진이 되었다. 기쁘다. 하지만 그보다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와 온기에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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