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게 받은 위로
다음날 L누나와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노르망디 지역을 여행하기로 했다. 며칠간의 여행을 위해 우리는 차를 렌트했다. 노르망디로 가기 전 오베르 쉬즈 우아즈에 먼저 들리기로 했다. 오베르 쉬즈 우아즈는 빈센트 반 고흐가 프로방스의 정신병원에서 힘든 시기를 보낸 뒤, 말년에 정착한 파리 외곽의 한 마을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곳이며 동생 테오와 함께 잠들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차를 타고 도심 밖으로 나오자 넓은 들판과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사람은 전혀 볼 수 없었다. 누나는 내게 요즘 어떤 음악을 듣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독일 음악가인 막스 리히터(Max Richter)의 음악을 듣는다고 했다. 우린 리히터의 Dream13을 들으며 도로를 달렸다. 창밖 풍경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음악에 귀 기울이며 창밖을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뿌연 안개와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한 시간쯤 되었을까 한적한 마을에 도착했다. 고흐가 생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 그의 방에 먼저 방문했다. 세계 여러 화가들 중엔 당대에 인정을 받아 좋은 집이나 정원을 소유해 살던 화가들도 있었지만 고흐의 삶은 반대였다. 삐그덕 거리는 여인숙의 낡은 계단과 방은 말년까지 구석으로 내몰린 그의 삶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벽에는 금이 갔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이 방에서 가슴의 총상으로 괴로워하던 빈센트, 그리고 형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극진히 간호를 했던 테오의 모습을 상상했다.
고흐의 마지막 작품 배경이 된 밀밭과 고흐 형제가 잠들어있는 공동묘지에도 방문했다. 묘지엔 묘비 두 개가 나란히 위치해 있었는데 개성넘치는 유럽의 묘비들 사이에서 반 고흐 형제의 무덤은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덤이 그들의 인생을 대변하는 듯했다. 특히 고흐의 삶을 가슴 깊이 사랑하는 L누나는 그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난 한참동안 묘비를 응시했다. 산다는 건 무엇일까? 지금은 세기의 예술가가 되었지만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그린 수백 점의 그림들 중에서 단 한 작품밖에 판매하지 못한 이 가난한 예술가의 인생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형에 대한 심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테오의 희생과 고통의 삶. 이 두 사람에 대한 뒤늦은 관심과 명예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불꽃처럼 뜨거웠던 예술가는 이제 땅 속에 묻히고 차가운 묘비 위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 비가 이 날의 장소와 잘 어울렸다.
한 예술가의 정신과 삶을 대하는 태도는 꺼지지 않고 세월과 국경을 넘어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름답게 여겨졌다. 나 자신도 시대의 흐름이나 타인의 시선을 위해서가 아닌 내가 믿는 가치와 신념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사명에 힘을 실어줬다. 그렇다면 내가 믿는 가치는 무엇일까? 당장 그 답을 알 수 없지만 이 날은 커다란 물음표 하나를 얻어오는 것만으로도 내게 큰 수확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에트르타였다. 아침부터 내내 흐렸던 날씨가 늦은 오후가 되자 차츰 개고 있었다. 먼 북서쪽 하늘에 아름다운 구름과 햇빛이 보였다. 그 방향이 우리가 가고 있던 해안마을 에트르타의 방향이길 속으로 빌었다.
마을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해안가로 갔다. 구름이 살짝 낀 하늘과 바다, 그리고 조용한 파도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바닥엔 모래가 아닌 돌멩이들이 깔려있었다. 투명하고 동그란 자갈들이 마치 잘 깎인 보석 같았다. 더 높은 곳에서 에트르타를 조망하기 위해 우린 성당 근처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대한 절벽 아래로 광활한 바다가 한눈에 펼쳐졌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바다의 전경을 내려다본 건 살면서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먼 곳의 절벽에는 과거 쿠르베와 모네가 즐겨 그렸다던 코끼리 모양의 절벽이 있었다. 나도 사진기가 보급되지 않던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이 아름답고 강렬한 풍경을 어떤 식으로든 남기려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연신 카메라로 사진을 담았다. 그리고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넓은 하늘과 바다가 내 근심과 걱정 따위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다 받아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행복했고 그 순간 더없이 자유로웠다. 난 무의식 중에 누나에게 "살아있길 잘한 거 같아요"라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반지하에 몇 날 며칠을 처박혀 스스로를 죽여가던 내 모습이 떠올라한 말이었다. 한동안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염려나 걱정들이 매우 작은 티끌처럼 느껴졌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의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 것일 수 있다고 했다. 광대한 풍경에 우리를 비추면 허약하고 수명도 짧은 우리의 몸은 나방과도 같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은 매우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활자로만 읽고 통과시켰던 그 진리를 실재적인 오감으로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우린 적당한 간격을 가진채 한 동안 말없이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옆에 누나 또한 풍경에 깊이 심취한 듯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묻진 않았지만, 대자연 앞에서만 꺼낼 수 있는 어떤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반추하고 있는 게 아닐까-하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여리고 위태로운 아이일 뿐인 것이다.
흐린 하늘, 태양이 구름 사이로 몇 번이나 등장했다가 숨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다 순간 먼 바다 하늘 아래로 동그란 원을 그리는 햇빛의 풍경이 펼쳐졌다. 믿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
다음 날엔 몽생미셸(Mont Saint-Michel)에 갔다. 그 섬 위에는 환상적인 모습의 기묘한 성 하나가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다. 노르망디의 주교였던 오베르가 천사 미카엘의 계시를 받고 지은 예배 건축물이라고 한다.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성 가까이에 다가갈수록 그 웅장한 전경에 압도되었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건물 꼭대기 층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내리쬐는 햇살은 따뜻했다. 천천히 수도원을 걸어 내려오는데 계단 근처에 조금씩 피어나는 살구꽃을 발견했다. 가문 내 마음처럼 세상도 내내 겨울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새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따뜻한 계절이 온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다. 피기 전 꽃나무 하나에 이런 깊은 위로를 받을 수 있다니 스스로 놀라웠다. 그 순간의 강렬한 기억을 사진으로 남겨두었다가 나중에 베를린으로 돌아와 그림으로 옮겼다.
이윽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니 렌터카 반납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우린 차를 급히 파리 방향으로 돌렸다. 조금씩 태양도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전 날과 마찬가지로 날씨는 흐렸다가 맑았다가를 반복했다. 자동차 속도를 높여 한참 가고 있는데 길 앞에 커다란 무지개가 보였다. 나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와! 무지개예요!!", "와 정말! 너무 이쁘다!!" 누나도 소리쳤다. 한껏 격양된 우리는 듣고 있던 노래의 볼륨을 더 키웠다. 자세히 보니 그 뒤에 흐린 무지개가 하나 더 있었다. 난 그날 난생처음으로 쌍무지개를 봤다. 가랑비가 내리는 차창 앞으로 와이퍼가 왔다 갔다 했다. 와이퍼가 무지개를 그리는 것처럼 보였다. 서쪽 구름 사이로 햇살이 드리워져 밭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눈앞의 다채로운 풍경과 멋진 음악이 한데 뒤섞여 그 순간 모든 것이 꿈의 풍경처럼 여겨졌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눈앞을 왔다 갔다 했던 와이퍼가 슬로모션처럼 그려진다. 시간은 순간의 감정과 상황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이미 자동차 반납시간은 지난 상태였다. 자동차는 아득한 어둠 속을 계속 달리고 있었다. 난 칠흑 같은 어둠이 신기해 창문을 내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바닥으로 쏟아질 듯 무수한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난 또 누나에게 창밖을 보라고 말했다. 누나도 창밖의 별들을 슬쩍 보더니 환호를 했다. 우린 결국 갓길 쉼터에 차를 세우고 별을 구경했다. 난 내심 반납 시간이 걱정됐지만 그녀는 "어차피 늦어진 거... 상관없어!"하고 말했다. 난 똑딱이 카메라를 자동차 위에 올려놓고 하늘을 바라보게 한 뒤 타이머 촬영으로 별을 담았다. 실컷 별구경을 하고 다시 자동차에 올라타며 나는 말했다. "누나, 오늘 진짜 자연한테 다 받은 거 같아요" 봄을 알리는 꽃, 빗길에서 마주한 쌍 무지개, 밤하늘의 별까지 정말 오늘 하루 자연에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을 다 받은 기분이 들어서 한 말이었다.
시간은 지날 대로 지나버렸다. 마음을 내려놓으니 조급한 마음이 사라졌다. 이제 거의 파리 시내에 다 와가는 듯했다. 창밖 먼 산을 보았는데 산과 산 사이에 주황색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산불이 났나 봐요." 내가 말했다. 누나도 가만히 보더니 "어머 정말..."하고 말했다. 몇 분 뒤, 그 빛이 붉고 거대한 보름달이었다는 사실을 우린 알게 됐다. 달력을 보니 그날은 3월 3일. 정월대보름 다음날이었다. 우린 또 한 번 기쁨의 환호를 했다.
"세상에... 달이 남아있었네..."
난 조금 아연의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이 날의 상황을 글로 옮기는 것만으로 다시 그때의 두근거림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마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난 자연과 계절이 주는 선물이 이렇게 나에게 절절하게 다가올 수 있음에 놀랐다. 그동안 자연은 적당한 거리에서 늘 친근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건물 속에 파묻혀 눈과 귀를 닫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자연 가까이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이때부터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