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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맑음 Apr 25. 2020

백수, 또다시 백수입니다.

1년간의 짧았던 회사생활을 정리했다. 그리고 또다시, 백수가 되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나는 좋아하는 것, 또는 잘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어려운 나이였다. 아니, 그럴 수 없었던 것은 어렸던 나이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나의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길을 잃어버린 잘못, 길 찾는 법을 몰랐던 잘못, 길을 알려달라고 도움을 청하지 않은 잘못. 어쩌면 그 모든 것.


졸업 후 여러 번의 계약직을 거쳤다. 나는 늘 조급했고, 당장 돈을 벌어야 했다. 첫 번째 계약직 업무를 종료한 후,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 길’을 가보려 했다. 하지만 역시 현실과의 저울질에서 나는 쉽게 그것을 놓아버렸다. 나는 돈이 필요했고, 좋아하는 것을 오래 기다려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그리고 그저 그런 직장인이 되는 것이 나의 꿈이 되었다. 적당한 곳에서, 적당하게 치열하게, 적당하게 숨 가쁘게. 그렇게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노력할 수 있는 방법조차 몰랐다. 그래서 또다시 적당하게, 그렇게 자리를 찾아갔다. 빠르지 않은 나이에 드디어 정직원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제 나도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리매김하리라. 멋있게 살고 있는 내 친구들처럼, 나도 계약 종료 이후의 일들을 걱정하지 않고, 적당히 성장하고 적당히 성장시키며 그렇게 살리라. 간간히 연애도 하고, 취미를 만들어볼까. 아, 우선 노후를 위해 연금 하나쯤은 있어야지.     


달라진 타이틀에 맞춰 부푼 꿈으로 열심히 일했다. 많이 배워보고 싶었고 어엿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적당하게 찾아간 자리는 적당한 값어치만큼을 했다. 밀리지 않는 월급, 상사의 어느 정도의 인정. 딱, 그 정도였다. 적당히 성장하고 싶다는 열망은 동료가 없고 목표가 없는 그곳에서 사멸되어갔다. 회사를 증오하는 직원들, 기본을 챙겨주지 않는 대표님, 지겹도록 끊이지 않는 정치 싸움의 현장에서 내 열심은 사그라들었다. 그 증오의 기운 속에서, 목표가 없는 그곳에서 내 영혼은 곡식 털 듯 탈탈 털려갔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백수가 되기로 했다.    


백수 7개월 차. 사실 이렇게 오랜 기간 백수생활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퇴사를 하면, 토익을 하면, 오픽을 하면 이젠 정말로 적당하게 성장할 수 있는 곳에 몸담을 수 있겠지. 서류에서 떨어질수록, 토익을, 오픽을. 가진 것들만 하나씩 늘려갔다. 취업 포털에서 누군가의 말이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37번째 자소서를 썼다. 이게 마지막이 되기를’. 포털 관리자는 그 말이 매우 인상 깊었던 듯싶다. 하지만 60여 개의 서류들 중에 연락을 받은 횟수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나는, 그 말이 아팠다. 열과 성을 다해 하나하나 써 내려간 서류들이 묵묵부답으로 돌아올 때, 겁은 살을 조금씩 파먹었다. 나, 취직할 수 있을까. 너무 늦어버린 걸까.    


하지만 백수 7개월 차. 나는 잘 살고 있다고 또다시 믿는다. 과거엔 돈이 필요해 조급하게 길을 가야 했지만, 지금 나는 7개월을 버틸 수 있을 만큼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 마음의 근육도, 조금씩 모은 월급만큼 조금씩 커졌다. 조급증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마음이 이전보다 건강해졌다. 무작정 퇴사한 것을 후회하냐고? 아니. 퇴사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조금 성장했다는 것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아파하며 또 성장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그렇게, 사실은 적당하지 않은 곳에서 영혼이 사라진 채 그렇게, 살지 않은 듯 살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수없이 떠돌아다닌 계약직 또한 후회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사람을, 일을, 사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성장했다.    


여전히 응답 없는 취업 시장 속에서 나는 여전히 무섭다. 이제 곧 생활비를 위해, 얼마 들어있지 않은 개인형 퇴직연금을 해약하러 가야 한다. 어떤 곳에 갈 수 있을지, 가야 할지 분명하지 않다. 객관적 지표로 본다면 나는 이 세상 속에서 루저, 의 위치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믿기로 했고, 믿고 있다.     


머지않은 날, 나는 도약을 시작할 거라고.     


나는 나에게 말한다. 걱정하지 말라고. 나의 모든 길이 잘못된 길이었고 설령 그것이 나의 잘못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잘못된 길들로 인해 나는 강해졌노라고. 나는 이제 강하고, 두려움은 나를 좌절시킬 수 없노라고. 내 길이 실패였다면, 실패였기에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나는 이제 과거 어리석은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기로 했다. 그리고 수고했다고, 애써 살아내느라 정말 많이 수고했다고 칭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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