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여행 때 사용할 수첩을 골랐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아 올 수 있을까?
우리 집 책장 맨 윗칸은 수첩이 차지하고 있다.
12년 동안 모은 여행 수첩을 세어보니 총 32권.
긴 여행은 수첩 한 권을 다 쓰지만 짧은 여행은 수첩 하나로 여러 번 기록할 수 있다.
귀찮다는 이유로 기록하지 않은 여행들도 있다. 지나고 나면 늘 후회하지만.
수첩을 펼치면 온갖 것들이 붙여져 있다.
잉크가 날아가 희미해진 영수증, 단풍잎, 꽃잎, 풀잎, 명함, 신문 기사, 유심카드, 버스 티켓, 즉석사진, 광고지, 미술관 팸플릿, 냅킨, 홍차 티백이름표, 교회 주보, 각종 스티커, 그림 엽서, 카페에서 받은 종이 코스터, 옷에 달린 가격표, 종이컵 홀더, 낱말 퀴즈, 원데이 패스 카드가 그것이다.
풀과 테이프로 붙일 수 있는 건 다 붙인다.
홍콩 리걸 오리엔탈 호텔에서 머물 때 엘리베이터 앞에 구비된 Daily China를 챙겨 읽었다.
영어 신문은 그것밖에 없었다.
매일 저녁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신문 모퉁이에 있는 타겟(Target)이라는 퀴즈를 풀었다.
아홉 칸에 아홉 개 알파벳이 무작위로 흩어져 적혀 있다.
중앙에 있는 알파벳을 포함해 네 글자 이상의 단어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정답은 다음 날의 신문에 실린다.
마지막 날 아침, 숙소를 떠나며 신문을 챙겼다.
마카오로 가는 배 안에서 타겟 정답을 확인하려 신문을 펼쳤다.
정답이 어디 갔지?
누군가 퀴즈가 담긴 문화면만 쏙 가져갔다.
그날의 타겟은 영영 정답을 알지 못한 채로 여행 노트에 붙어 있다.
홍콩에서 저녁마다 침대에 엎드려 타겟을 풀어보려 끙끙댔다.
짧은 영어 실력이라 둘이 머리를 맞대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숙소 앞 마트로 간식을 사러 갔다.
간식을 사고 계산을 하면 점원이 쿠폰을 한두 개 줬다.
일정 금액이 넘어가면 쿠폰을 주는 상점 중 하나였다.
몇 개부터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 매장 벽을 살펴보았다.
쿠폰에 관한 규정이 적힌 글은 찾을 수 없었다.
부지런히 마트를 들락거리며 7개를 모았다.
10개부터 사은품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물건을 좀 더 샀을지도 모른다.
남편과 나는 서로에게 질문을 떠넘기다 결국 답을 알지 못했다.
쿠폰 7개는 여행 수첩에 잠시 보관중이다.
다음에 다시 가면 꼭 사은품을 받고 말테다.
수첩을 가지고 다니다 보면 간혹 마주치는 빛나는 순간들이 있다.
스쳐가는 찰나를 재빨리 기록하거나 그릴 수 있는 민첩함만 있다면 나만의 유일한 책을 만들 수도 있다.
이를테면 이런 거.
순천만을 가려고 순천 시내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정류장에 앉아 있던 할머니 한 분이 묻는다.
“어디가노?”
“순천만이요”
“볼 게 하나도 없는데 거긴 왜 가노?”
또 언젠가는 화순 시내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가 출발하자 할머니 한 분이 다른 할머니에게 묻는다.
“빠게쓰는 어딨는교.”
“...”
“아이고 할머니 빠께스 놔두고 타셨네.”
“기사님 차 좀 세워 주이소.”
버스가 선다. 빠께스를 시장에 놓고 온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 성화에 못이기는 척 느릿느릿 내린다.
버스는 다시 출발한다.
남은 할머니들이 말한다.
“저 할매 아까 빠께스 비싸다고 만지지도 못하게 하더니만 두고 왔네.”
“가방도 놔두고 그냥 탄 것 같은데.”
“술 한잔 마시고 탔나 보네.”
까맣게 잊고 있던 장면이 수첩을 넘길 때마다 되살아난다.
기록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카페에서 편안히 쉬거나 침대에 눕고 싶은 유혹을 참으며 그날의 일과를 정리해야 한다.
길을 걷다 멈춰 서서 메모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영수증 챙기는 것도 귀찮다.
하지만 여행 노트를 완성할 때 느끼는 만족감을 떠올리면 포기하기 어렵다.
여행 수첩은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 할 때도 유용하게 쓰인다.
우리가 다녀온 루트 중 가장 좋았던 장소만 선별해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
10년 전 다녀왔던 여행지라도 떠나기 전 여행 노트만 챙기면 준비 끝.
기억은 잊혀도 기록은 남는다.
이번 여행을 위해 고른 노트는 월간지 ‘좋은 생각’에서 받은 것이다.
‘좋은 생각’에서 원고 응모하는 글을 보았다.
상금을 준다기에 도전했다.
글 두 편을 써서 응모했고 떨어졌다.
좋은 생각을 하는 회사라 그런지 참가자 전원에게 위로의 선물을 보내 주었다.
좋은 생각 잡지 한권, 가로줄 노트 한 권, 무지 노트 한 권이다.
노트는 10.5cm x 15 cm의 손바닥 크기이고 표지는 계란 지단색이다.
상단에는 THINK 라고 적혀있다.
노트를 펼칠 때마다 심사에서 떨어졌다는 아픔과 여행을 한다는 기쁨이 동시에 느껴질 것 같다.
모과는 이미 여행 기록을 시작했다.
뜻밖에 결정된 여행이라 그런지 마음이 한껏 들떠 있다.
여행을 기념하겠다며 8절 스케치북에 도쿄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하루에 한 장씩. 여행 53일 전부터 시작했다.
아직 28일 남았다.
밤마다 꾸벅꾸벅 졸며 붓질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창작 의욕을 꺾지 말란다.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