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품과 선물

by 유자와 모과

우리 집 255리터 2도어 냉장고 문에는 냉장고 자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물건 밀집도가 가장 높은 장소라 마음이 심란할 정도다.

결혼 후 함께 여행했던 도시들을 기념하기 위해 하나씩 모으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지인이 해외 여행을 다녀오면서 사다주기도 한다.


결혼 초기에는 가족과 지인에게 줄 기념품을 꼭 챙겼다.

베이징 이케아에서는 티라이트를 넣을 수 있는 커다란 철제 램프를 12개나 들고 오기도 했다.

한국에 이케아가 없던 시절이었다 하더라도 미친 짓이었다.


선물을 사다주려고 마음먹으면 여행하는 내내 마음이 쓰인다.

뭘 사다줘야 할까? 마음에 들어 할까?

기념품을 고르느라 반나절이 지나기도 한다.

정신적 소모가 크다.

선물을 사야 한다는 의무감을 버리니 여행이 가벼워졌다.


나를 위한 선물도 사지 않는다.

기념품은 대부분 집에 가져오는 순간 유물이 된다.

이제는 처음 방문하는 도시에서 사는 기념품은 자석밖에 없다.

자석은 가볍고, 저렴하고, 부피가 작아 여행을 기념하기 딱 좋은 물건이다.

단점도 있다. 냉장고 자석이 아무리 특색 있어봤자 비슷비슷하다보니 자석을 봐도 그 도시의 풍경이나 그때의 상황이 단번에 떠오르지 않는다.

냉장고에 붙어 있는 것 외에는 쓸모없다는 것도 단점이다.

간혹 갤러리를 구경하듯 냉장고 문을 감상하긴 하지만.


기념품은 사지 않지만 여행지를 구경하다 우연히 들어간 상점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도 있다.

일상에서 사용할 것들이다.

어디서건 물건을 살 때마다 질문한다.

일주일에 몇 번 사용할까?

이걸 대체할 물건이 집에 없을까?

얼마나 오래 사용할 수 있나?

이 물건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을까?

엄격한 질문을 통과한 몇몇 기념품은 일상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한다.


상하이에 갔을 때 차 도구를 전문으로 파는 상점에 방문했다.

대부분 가격이 붙어 있었는데 한국보다 저렴했고 종류도 많았다.

자사호와 찻잔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방짜 주석 차통과 표면에 빙렬이 있어 찻물이 조금씩 물들어가는 찻잔을 구입했다.

주말 오후 홍차 잎을 꺼내거나 보이차를 마실 때 사용한다.


차반 위에 올려놓은 올빼미 모양의 차총은 도자기로 유명한 오키나와에서 구입했다.

엄지손가락만하다.

차를 마실 때마다 총명한 올빼미가 검은 눈으로 빤히 바라본다.


매일 아침 커피를 따르는 커피 잔은 교토 골목길에 있는 상점에서 구입했다.

붓으로 푸른 물감을 찍어 한 획 한 획 그어놓은 디자인으로 그 지역 도예가가 만든 것이다.

컵 바닥 중앙에 한자로 된 서명이 춤추듯 새겨져 있다.

은은한 쪽빛으로 물든 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친구와 함께 골목길을 서성이던 모습이 떠오른다.


하노이 골목에서는 여러 가지 고운 색을 베틀에 넣고 짠 듯한 직물 머플러를 발견하고 감탄했다.

개당 4천원을 주고 색이 다른 걸로 두 개를 구입했다.

순식간에 숨 막히는 무더위를 잊을 정도로 기분 좋았던 순간이었다.

어떤 옷이든 잘 어울려 여름만 제외하면 데일리 단골 머플러로 활약 중이다.


오사카에서 구입한 중고 바흐 음반과 싱가포르에서 구입한 데이브 브루벡의 음반도 있다.

음반을 골라 오디오에 넣을 때마다 순식간에 음반을 고르던 그 장소로 되돌아가 있다.


거실과 주방을 가르는 탁자 위에는 높이 10cm 정도의 고만고만한 꽃병 네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이 나라 저 나라를 구경하며 하나씩 모으다 보니 그렇게 됐다.

베란다에 잔뜩 놓인 화분 중에서 작은 가지를 잘라 꽃아 놓으면 작은 정원이 완성된다.

현재는 아이비, 뱅갈 고무나무, 애플 민트, 나비란이 초록 향을 풍기고 있다.


기념품은 자석밖에 사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생각해보니 또 하나가 있다.

영문 서적이다.

집에 가지고 오면 다시는 펴보지 않을 걸 알면서도, 이번에는 다를 거라며 사게 된다.

길을 걷다 중고서점을 발견하면 일단 들어간다.

천천히 구경하다보면 마음에 드는 시집을 발견하기도 한다.

시는 언제 읽어도 좋다.

얇은 시집은 가방에 넣고 다녀도 부담 없다.

여행지에서는 종종 펼쳐 읽지만 집에 돌아와 책장에 꽂히는 순간 그걸로 끝이다.


우리 집에는 작은 책장이 딱 하나 있는데 책장에 꽂힌 건 거의 영자 소설과 시집이다.

그 책들은 언젠가 꼭 읽을 거라는 기대를 품으며 골랐지만, 아직 한 번도 펼쳐보지 못했다.

집 앞 도서관에 한글 신간 서적이 넘쳐 나는데 굳이 먼지 쌓인 페이퍼백을 볼 이유가 없지 않나.

개리 스나이더, 셰익스피어, 조지 엘리엇, T.S.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 같은 위대한 작가들은 오늘도 책장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리고 계신다.

냉장고 자석과 비슷한 처지라고나 할까.


크루즈 내부에는 기념품 매장이 있다고 한다.

배 모양의 자석 하나를 살 예정이다.

독특한 무늬가 있는 티셔츠가 있다면 구입할지도 모르겠다.

크루즈 여행은 처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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