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by 유자와 모과

어릴 적 우리 집 차는 낡은 스타렉스였다.

시골 교회에서 목회를 했던 부모님은 교회 차량으로 성도들을 데리러 갔다.

하루에도 몇 번 차량을 운행해야 할 일이 생겼다.

방학에 물놀이를 가거나 할머니 집을 갈 때도 봉고차를 타고 갔다.

뒷좌석에는 백과사전만한 지도책이 꽂혀 있었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이었다.


아빠는 간혹 지도책을 펴고 길이 맞는지 확인했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과 별 차이가 없었다.

빽빽한 선들로 뒤덮인 지도를 해독하는 아빠가 신기했다.

어른이 되서는 차를 끌고 다니는 친구들 신세를 졌다.

지도는커녕 지하철 노선도도 볼 줄 몰라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친구가 서울 역으로 마중을 나왔다.

지도를 펼치고 고개를 숙여 무언가를 찾고 있는 관광객을 볼 때마다, 종이에 적힌 선만으로 원하는 목적지를 찾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다 모과를 만났다. 둘 다 직장인이었고 차가 없었다.

차는 없었지만 여행은 좋아했다.

우리는 버스와 기차를 타고 자주 떠돌았다.

여행하면서 지도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정교한 세계였다.

가느다란 선으로 그어진 수많은 교차점들, 건물과 도시 지명들. 도로와 번호들. 지도에 표시된 바로 그 자리에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무릎 담요만한 지도 한 장 안에 한 도시와 나라가 담겨 있다.

1861년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김정호 선생이 위대하게 느껴진다.


시행착오를 걸쳐 지도 보는 법을 터득했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서 있는 위치와 방향을 정확히 아는 거다.

지도를 보고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예전에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여행이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목적지를 찾는 여정 자체가 여행이 되었다.

지도를 펼치고 어느 길로 갈지 고민하는 즐거움을 어디에 비할 수 있으랴.

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라 구불구불 색연필로 칠하는 기쁨을 어디에 견주어야 할까.

미로 같이 복잡한 길을 지도만 의지하여 찾아냈을 때 밀려오는 뿌듯함. 낯선 골목길을 수없이 헤매다 보면 지도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눈이 트이는 거다.

지도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생전 처음 가는 길도 두렵지 않다.

손안에 차곡차곡 접힌 지도가 있으니까.


지도가 그려진 표지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아무렴. 나는 지도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자부심이 마음 깊이 솟아난다.

누군가 길을 물어보면 가장 쉽고 적확한 표현으로 알려주려고 노력한다.

지도를 보는 능력이 이토록 삶을 윤택하게 할 줄은 몰랐다.

나와 모과는 스마트폰 대신 여행책자로 여행 계획을 세우고 종이 지도를 손에 쥔 채 어디든 찾아간다.

스마트폰 대신 종이 지도를 선호하는 이유가 있다.

도시 조감도가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도시의 전체 모습을 머릿속에 새겨 놓으면 여행이 훨씬 수월해진다.

도시가 한 눈에 보여 어디를 방문하면 좋을지 감이 온다.


국내 여행을 떠날 때는 그 지역 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관광 안내 책자를 신청한다.

책자 에는 지도 뿐 아니라 지역 특산물과 맛집 정보, 관광명소가 담긴 책자가 뭉텅이로 들어 있다.

그 도시에서 내세우고 싶은 부분이 어떤 건지 알 수 있다.

지역별 관광지도는 휴게소에도 구비되어 있다.

휴게소에 들릴 때마다 한 번씩 살펴본다.

해외여행을 갈 때는 지도가 부록으로 들어있는 여행 책을 구입한다.

수없이 많은 여행을 하며 길을 찾지 못해 헤맸던 도시는 없었다.

베니스를 제외하면 말이다.


베니스로 말하자면 시내 전체가 미로공원이었다.

산토리니도 골목길이 끝없이 갈라지긴 했지만 베니스만큼은 아니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 몸에 소의 머리를 갖고 태어난 미노타우로스가 감금되었다는 미궁이 사실은 베니스였는지도 모른다.

나와 모과는 베니스에서 한인 민박집에 머물렀다.

거기서 대학생 친구 두 명을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다 마르게리타 광장 옆 술집 얘기가 나왔다.

거기서 파는 칵테일이 유명하다고 해서 가보려 하는데 우리보고 함께 가잔다.


베니스 본섬은 거꾸로 된 S자 모양의 수로를 따라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한쪽은 산마르코 광장이 있는 관광지이고 다른 쪽은 마르게리타 광장이 있는 주거지이다.

두 사이를 잇는 건 리알토 다리다.

우리가 묵은 민박집은 관광지에 있었다.

그들은 다음날 다른 민박집으로 숙소를 옮겼기에 저녁 7시에 광장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핸드폰 로밍을 하지 않았기에 컴퓨터 메일 외에는 그 친구들과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어떤 일이 생기든 반드시 그 시간에 광장에 있어야만 했다.


해가 지기 전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일찌감치 리알토 다리를 건너 마르게리타 광장을 향해 걸었다.

모과는 인간 내비게이션이라 웬만한 곳은 감으로 찾아 가지만 베니스에서는 지도를 한 손에 꼭 쥐고 있었다. 한참 동안 지도를 보며 열심히 걸었다.

고개를 드니 아까 건넜던 리알토 다리가 보인다.

어찌 된 셈이지? 골목을 뱅글뱅글 돌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깔깔대며 웃었다.

몸을 돌려 다시 길을 되돌아갔다.

지도를 보며 열심히 걸어갔다. 고개를 들어보니 리알토 다리가 눈앞에 있었다.

모과를 노려보았다.

해가 스멀스멀 지기 시작했다.

모과는 정신을 차리겠다고 다짐했다.

세 번째 시도 끝에 우리는 마르게리타 광장에 도착했다.

6시 30분이었다. 늦지 않아 다행이었다.

광장 모퉁이에 있는 가게에 앉아 젤라또를 먹으며 친구들을 기다렸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바람이 불어왔고 광장은 금세 한적해졌다.

구석에서 청년 몇 명이 떠들고 있을 뿐이었다.

한 시간이 지났다. 친구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길 찾는 게 쉽지 않을 거야. 우리도 이렇게 고생했는데.”

“그래도 걔네는 아이폰이 있잖아. 구글 맵이 다 알려줄 텐데.”

“그러게. 이제 곧 오겠지.”


8시가 되었다. 친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찬바람이 좀 더 세게 불어 왔다. 광장은 이제 텅 비었다.

더 이상 기다리다간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광장 한쪽에 있는, 그 유명하다는 작은 술집만이 은은한 조명을 밝히고 있었다.


“약속을 까먹은 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다른 데 관광하다 시간이 너무 늦어져 못 온지도.”


술집은 사람들로 복작였다.

칵테일을 주문했다.

황금색과 주황색이 섞인 칵테일에서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왔다.

알코올이 함유된 고급스러운 환타 맛이었다. 달콤하고 시원했다.

몇 시간 고생해서 마신 보람이 있다며 서로를 위로했다.

알고 보니 그 칵테일은 이탈리아 식전주로 마시는 스프릿 아페롤(Spritz con Aperol)이었다.

어디서나 쉽게 마실 수 있는 음료였다.

어쨌거나 우리는 알코올의 힘을 빌려 단번에 리알토 다리를 찾았고 무사히 숙소로 돌아왔다.

메일을 확인했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죄송해요. 어제 저녁에 광장 찾는 게 너무 어려워서 몇 시간을 헤맸어요. 내비게이션으로 확인하면서 갔는데도 아무리 해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간신히 광장에 도착하니 9시가 넘었고 아무도 없기에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데 또 길을 잃어 한참을 헤맸어요. 너무 오래 찬바람을 맞아 그런지 감기에 걸렸네요. 정말 죄송해요.’


도쿄는 베니스에 비하면 튜브 타고 헤엄치기다.

도쿄 여행 책을 주문했다.

좋은 책이 많지만 수록된 지도로만 따지면 클로즈업 시리즈가 마음에 든다.

5년 전 도쿄 여행에서도 <클로즈업 도쿄>를 가지고 갔다.

예전 책은 버렸기에 할 수 없이 같은 책을 다시 주문했다.

개정판이라고 하니 조금은 달라졌겠지.

지도를 보며 꿈꿀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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