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엥겔지수가 높다.
식비를 제외하고는 돈 쓸 일이 없다.
게으름 때문이다.
둘 다 쇼핑을 싫어하고 물건 고르는 걸 어려워한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산다.
오래되어 솔기가 터져버린 신발은 실로 꿰매고, 냄비 뚜껑 손잡이가 삭아 떨어지면 망치로 다른 나사를 박는다.
고쳐 쓰고 바꿔 쓰는 게 재미있기도 하다.
한번 산 물건은 아껴 쓰고, 고쳐 쓰고, 다른 용도로 다시 쓰자가 우리 집 신조다.
가구는 침대, 책상, 의자만 있으면 충분하다.
평소에는 주로 집에만 있기에 여행은 다른 이들의 삶을 바라보는 좋은 기회가 된다.
활자로만 구경하던 바깥세상을 눈 앞에서 관찰하는 동시에 내 삶은 멀찌감치 물러나 볼 수 있다.
내가 그 자리에 없어도 태양은 뜨고 사람들은 하루를 보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여행지에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좋다.
여행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성실히 살아가던 일상을 잠시 멈춘 후 기름칠 하고 윤기 내는 시간이다.
여행할 당시에는 알지 못하지만 지나고 나면 삶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불현 듯 마주치는 자연의 위대함을 보며 겸손을 배운다.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한다. 인간이 만든 건축물에 감탄한다.
그림과 조각을 한 작품이라도 더 시야에 담으려 애를 쓴다.
타인의 언어와 몸짓을 이해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국적과 언어에 상관없이 친구가 된다. 잠시 스치는 인연일지라도.
가지각색의 물건을 지칠 때까지 구경한다.
여행지에서 평소와 다른 풍경을 발견할수록 기쁨은 커진다.
작은 나뭇가지 새장에 애완용 귀뚜라미를 넣어 주머니에 차고 다니던 베이징 어르신들, 일요일 오후 홍콩 섬 공원에 빼곡하게 모여 카드 게임을 하던 필리핀 가정 도우미들, 하노이 맥주거리에 빽빽하게 놓인 목욕탕 의자와 거기에 쭈그리고 앉아 맥주를 마시던 사람들,
까만 올리브와 두툼한 날생선이 올라간 타파스로 가득했던 산 미구엘 시장, 돼지 넓적다리를 소금에 절여 말린 하몽을 멜론에 둘둘 감아 내주던 톨레도 식당, 날렵하게 벽을 기어 다니던 호이안의 도마뱀, 부리와 다리가 샛노랗던 싱가포르 찌르레기, 가로수로 심겨져 있는 야자나무.
하나하나가 새롭고 신기하다.
여행 초창기에는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 여러 번 여행을 하면서 깨달았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김동률의 ‘출발’이란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멍하니 앉아서 쉬기도 하고/ 가끔 길을 잃어도 서두르지 않는 법/ 언젠가는 나도 알게 되겠지/ 이 길이 곧 나에게 가르쳐 줄 테니까’
여행을 하다보면 버스와 기차를 놓치고, 안경을 잃어버리고, 바가지를 쓰고, 커피를 쏟고, 환전을 하다 사기를 당하고, 노로 바이러스에 걸리고, 화재 벨소리에 놀라 새벽에 깨어나고, 폴라로이드가 망가져 버린다.
여행이란 수시로 발생하는 돌발 상황을 처리하는 능력을 키우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한 사건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남해 여행을 갔을 때 일부러 시간을 내어 전주 시립 미술관에 들렸다.
임시 휴관 중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쉬는 날도 아니었고 홈페이지에 공지도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다.
맛있다고 하여 어렵게 찾아간 식당에서 개인 사정으로 오늘 문을 닫는다고 써 붙인 글을 본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변덕스러운 날씨도 한몫 한다.
공원을 걷고 골목길을 산책하고 야외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려는 계획은 폭우가 쏟아지거나 비바람이 불면 끝이었다.
화를 내도 닫힌 식당 문이 열리거나 오던 비가 그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년 간 시련 끝에 마음 비우는 법을 터득했다. 바꿀 수 있는 건 내 마음뿐이란 걸 깨달았다.
마음은 진화했다.
저가 여행사에서 진행한 제주도 취항 기념 파격 세일 특가 표를 사서 짐을 꾸린 적이 있다.
비행기를 타기 몇 시간 전 가까운 친척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표를 취소하고 장래식장에서 밤을 새웠다.
이제는 제 날짜에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여행이 끝나면 인생이 레벨 업 된 기분이 든다.
고생한 여행일수록 더 그렇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말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는 가장 값진 체험은, 이 세상에서 신(神) 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경이로운 느낌이라고.
그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여행에서 돌아오면 일상의 사소한 불편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진다.
여행 때는 이보다 더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옷장이나 신발장을 열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 든다.
운동화가 세 켤레나 있다고?
만족스러운 기분은 며칠 혹은 몇 주가 지나면 차차 옅어지지만 삶을 향한 긍정은 오히려 강화된다.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이번 여행은 편안한 시간이 될 것 같다. 태풍만 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습도도 낮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