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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Apr 10. 2024

크루즈 승선

여행이 시작되는 날이다. 

일주일 전부터 혹시 코로나에 걸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3년 6개월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은 걱정을 이제야 한다. 

과로하지 않으려 책도 조금만 읽고 글도 조금만 썼다. 

잠은 많이 잤다. 여행을 핑계로 일주일 동안 게으름을 피웠다. 


매일 도쿄 날씨를 확인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날씨 예보는 계속 바뀌고 있다. 

한국은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다. 낮에도 30도를 넘지 않는다. 

도쿄 날씨는 33도를 웃돌고 있다. 

더위와 습도를 이기며 잘 걸어 다닐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뒤늦게 반바지를 두 벌이나 샀다. 인터넷으로 도쿄 지하철 3일 권도 구입했다. 

결제를 하자마자 문자로 큐알 코드가 왔다. 

도쿄 지하철 탑승권 기계에서 티켓으로 바꿀 수 있다. 

세상이 언제 이렇게 좋아졌지? 

일본에서 쓸 유심은 한 개만 구입했다. 

남편 핸드폰만 쓸 예정이다. 


24인치 트렁크와 21인치 트렁크를 각각 끌고 수원 역에서 기차를 탔다. 

아침인데도 기차 안이 꽉 찼다. 

부슬비가 내린다. 여행하는 분위기치고는 칙칙하지만 태풍이 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대전을 지나니 하늘이 차츰 개이면서 구름이 낮게 깔린다. 터널과 비닐하우스를 지난다. 

대구쯤 오니 울상이었던 하늘 얼굴이 펴졌다. 

해가 난다. 하늘이 높아진다. 


중고 서점에서 구입한 롤프 포츠의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는 책을 다 읽으니 부산에 도착한다.

 마음에 남은 문장은 이것이다. 

‘하지만 과감히 첫발을 내딛고 길에 들어서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두렵기는커녕 모든 것이 편안하고 짜릿하게 느껴진다. 음식을 주문하고 버스를 타는 것조차 특별하고 새로운 경험으로 와 닿는다. 집에서는 무시하고 지냈던 것들, 예컨대 청량음료의 상쾌한 맛, 라디오 소리, 공기냄새가 새삼스레 달리 느껴진다.’ 


 며칠 전 크루즈 대행사 측에서 메일로 알려준 집결 장소로 간다. 

부산항국제여객 제 2터미널이다. 

승선시간은 오후 4시지만 원활한 수속을 위해 3시까지 오라고 적혀 있다. 

부산 역에서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다.

 연결 통로도 잘 되어 있다. 

텅텅 비어 있는 주차장을 가로질러 2터미널 역사로 들어선다. 

잘못 찾아왔나 싶을 정도로 실내 규모가 작다. 좌석 수는 총 64개. 

모든 자리가 꽉 차 있어 앉을 데가 없다. 

목이 마르나 매점도 정수기도 없다. 


얼추 80명 정도 모인 것 같다.

한국 어르신이 대부분이지만 아이와 함께 온 가족이나 젊은 커플들도 눈에 띈다. 

내가 타는 프린세스 크루즈는 도쿄에서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다시 도쿄로 가는 코스이다. 

도쿄에서 탄 일본인 승객이 대부분일 거다. 

나처럼 중간 경유지인 부산에서 타는 사람은 적을 수밖에. 


입구 한쪽에 부산을 구경하고 다시 배로 돌아가는 승객을 위한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새로 탑승하는 승객들이 줄을 서서 선박에서 신분증으로 사용할 사진을 즉석에서 찍는다. 

크루즈 메달과 방 위치 안내문을 받고 여권을 제시하고 짐을 검색대에 통과시키면 끝이다. 

전기포트, 칼, 주류 등은 반입 금지 품목이다. 

보안 검색대에서 이를 발견하면 크루즈에 보관한 뒤 하선할 때 돌려준다. 비행기보다 친절하다. 

검색대를 나오니 크루즈에서 시원한 물을 준비해 놓았다. 물을 한잔 마시고 배를 타러 간다. 


목에 건 메달은 신분증이자 신용카드이자 방 키를 대신한다. 

500원짜리 동전만한 크기다. 

메달로 결제한 모든 비용(쇼핑, 유료 레스토랑, 선사 기항지 투어, 음료 등)은 하선할 때 일괄적으로 계산된다. 결제내역은 객실 내 설치되어 있는 IPTV, 핸드폰 크루즈 앱, 선내 키오스크에서 확인 가능하다. 

잘못 결제된 부분이 없는지 틈틈이 확인하는 게 좋다. 


이제 갱웨이(Gangway)로 걸어갈 시간이다. 

갱웨이는 크루즈와 항구를 연결하는 출입구로 승선과 하선할 때 항상 거쳐야 하는 통로다. 

크루즈 책을 읽으며 엄청 넓고 커다란 입구를 상상했는데 실제로는 매우 좁았다. 

입구에서 한명씩 서서 스캐너에 메달을 갖다 대야 한다. 

방금 전 찍은 내 얼굴 사진과 이름이 스크린에 뜬다. 드디어 배를 탔다. 


여행 책에서는 미리 짐을 붙이면 승무원들이 방마다 옮겨 준다고 적혀 있었는데, 우리는 중간에 합류해서 그런지 직접 트렁크를 끌고 가야 한다. 

크루즈 티켓에 적힌 선실번호를 찾아 객실로 이동한다. 

우리 방은 8층이다.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지도(덱 플렌)로 방 위치를 확인한다. 

배 앞쪽의 첫 번째 방이다. 위치가 최악이었다는 사실을 하루가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복도가 끝도 없이 길다. 우리 엄마라면 분명 길을 잃었을 거다. 

복도 폭은 턱없이 작다. 가져간 줄자로 재어보니 120cm이다. 

한 명씩 나란히 걸어가야 한다.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성큼성큼 걸어본다. 총 340걸음이다. 

8층 방 개수는 187개. 

객실 가까이 가면 메달에 있는 센서가 인식되어 남편과 내 얼굴이 뜨며 문이 자동으로 딸깍 열린다. 

스크린 도어라는 의미는 아니다. 손잡이로 열고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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