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자와 모과 Apr 03. 2024

소심한 여행자는 고달프다

남편은 낯을 많이 가린다. 

‘소심 대회’에 나가면 우승은 바나나 껍질 벗기는 것처럼 쉬울 거다. 

MBTI 검사에서 성향을 나누는 첫 지표는 내향(I)과 외향(E)이다. 

내면세계를 탐험하는 데 관심이 있는지 세상과 타인을 관찰하는데 관심이 있는지 알려주는 척도다. 

회사에서 실시한 테스트에서 남편의 내향형 점수는 무려 100%가 나왔다. 

팀원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극 I 라 좋은 점도 있다. 

남편은 함부로 말을 내뱉지 않는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고백해도 된다. 

그는 메아리도 울리지 않는 대나무 밭이다. 

단점이자 장점인 내향형 100%는 여행지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행을 하다 현지인과 접촉할 일이 생기면 남편은 당연하다는 듯 나를 떠민다.

"네가 얘기할거지?”

질문이나 대화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나도 어떤 면에서는 꽤 소심하다는 거다. 

물건을 사야 하는데 매장에 아무도 없다면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종업원이 나만 졸졸 따라다니면 어떡해. 길에서 건네주는 전단지도 거절하지 못한다. 

뻔뻔해도 살아남기 힘든 세상인데 부부가 일심동체로 소심하니 뭐 하나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동대문에서 난데없이 뺨맞고 돌아오는 길에 남대문에서 뺨 맞아도 묵묵히 견딜 기세다.

 

여행지에서 시장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면서도 가장 두려운 장소이기도 하다. 

흥정을 해야 하니까. 

편의점이나 마트처럼 가격이 정확히 적혀 있다면 오죽 좋을까. 

시장의 포인트는 가격 깎는 재미라고 말하는 지인도 있지만 나는 시장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해도 가격이 붙어 있지 않다면 그냥 지나친다. 

남편은 이미 지나갔다.


밖에서 새는 바가지 집에서도 샌다. 

여행지는커녕 동네 시장에서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어느 주말에 봉골레 파스타를 만들기로 했다. 평소라면 롯데 슈퍼에서 깔끔하게 포장된 바지락 두 봉지를 샀을 텐데 그날따라 뭔 생각인지 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싱싱한 해산물을 싸게 사서 마음껏 먹어보자는 욕심 때문이었다. 


서울 살 때라 집 근처에 인왕 시장이 있었다. 

과일이란 과일은 죄다 늘어져 있는 좌판 구역을 간신히 뚫고 수산물 가게에 도착했다. 

가게 밖에 주르륵 놓인 다라이에 조개와 생선들이 담겨 있었다. 

가격은 적혀 있지 않았다. 주인이 물었다.


“뭐 드릴까?” 

“바지락 좀 사려고요. 오천 원치만 주세요.” 

“뭐 해먹게?” 

“파스타요.” 

“그래? 그럼 이것도 좀 사. 요거 넣으면 더 맛있어. 오늘 가리비도 싱싱한데. 

새우도 싸. 오늘 들어온 거야. 스물다섯 마리에 만원인데 줄까?” 


 머릿속엔 저 커다란 조개는 얼마나 비쌀까 하는 걱정뿐이었지만 말 한마디 못했다. 

이것저것 아주머니가 싸주시는 대로 받았다. 

우리는 던지는 족족 낚싯대에 낚이는 얼빠진 물고기니까. 

검은 봉지를 양손에 들고 간신히 집에 돌아왔다. 

봉지 안에 든 조개를 바라보다 조개 찜으로 메뉴를 바꿨다. 

새우는 어쩌지? 늦은 밤 이쑤시개로 새우 내장을 제거하다 지쳐버렸다. 

내가 원했던 건 봉골레 파스타였는데.


여행을 하다보면 상인과 흥정하는 관광객을 종종 마주친다. 

그들은 탁구시합 중이다. 

가격을 주고받으며 노련한 경기를 펼친다. 

핑퐁 핑퐁. 경이로운 광경이다. 

상점 주인이 손님과 가격 밀당을 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노려 물건들을 구경한다. 

치열한 경기가 끝나고 거래가 이루어질 때쯤 우리는 조용히 다음 경기를 즐기러 이동한다. 


소심한 성격이 도움 되는 부분도 있다. 

여행을 떠날 때나 되돌아 올 때나 짐의 양이 변함없기 때문이다. 

가격이 붙어 있는 기념품 한 두 개만 더해질 뿐이니 가벼운 캐리어를 끌고 어디든 갈 수 있다. 

이전 18화 여행을 떠나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