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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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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와 모과
Aug 16. 2024
1월
* 새해
아침에 눈 뜨니 세상이 환하다.
새해 첫날은 매번 늦잠을 잔다. 전날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늦게 잠자리에 들기 때문이다.
한 해의 첫날이라 마음이 설렌다. 과일 샐러드로 아침을 먹고 커피를 한 잔 내려 책상에 앉는다.
새해 첫날이니 글을 써야지. 남편도 그림을 그리겠다며 스케치북을 편다.
점심은 남편이 만든 떡볶이. 고추장을 넣지 않았는데도 떡볶이 맛이 난다.
나른할 무렵 함께 키보드와 기타를 치며 악보를 맞춰본다. 합주가 잘 되니 흥이 난다.
늦은 오후, 헬스장에 갈 시간이다. 며칠 전까지 한가하던 헬스장이 북적북적하다. 새 마음 새 뜻으로 무장한 회원들이 아령을 들고 트레드밀을 걷는다. 보기 좋다.
저녁은 생선 구이. 조기 다섯 마리를 오븐에 구워 남편과 사이좋게 나눠 먹는다.
그새 컴컴한 밤이 되었다. 남편은 소설책을 펼치고 나는 에세이를 읽는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자야 할 시간이다. 마음에 쏙 드는 하루였다.
매일 매일이 새해 첫날만 같으면 좋겠다.
* 겨울나무
‘나뭇잎들이 기어이 다 떨어지고/ 봐라, 그는 서있지/ 나무의 몸통과 가지/ 벌거벗은 맨몸의 힘으로’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 ‘참나무’(The oak)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한이다. 가로수와 공원 나무들은 옷을 벗었다.
털장갑, 털모자, 털목도리, 패딩으로 몸을 감싼 채 맨몸으로 서 있는 나무 곁을 지난다. 미안하기도 하고 당당한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나이가 들수록 겨울이 싫어진다. 나무로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할까?
집 앞 목련나무 가지와 줄기 끝에 솜털 같은 겨울눈이 달렸다.
목련나무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스스로 털옷을 지어 입는다. 다른 나무도 목련처럼 똑똑하게 자기 살 길 찾으면 좋겠다.
* 계획
12월 말이 되면 다음 해 목표를 세운다. 올해는 목표 3개를 정했다.
1월은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달이다. 다른 달보다 분주하고 열심히 산다.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아직 11개월이 남았으니 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도 든다.
하루하루를 밀도 있게 살려 노력한다.
희망이 있는 달, 나도 너도 의욕이 넘치는 달, 하얀 눈도 힘차게 내리는 달, 깨끗하게 펼쳐진 한 해를 볼 수 있는 달. 1월이 가진 힘이다.
* 꼬막
부모님 집에 갈 때마다 반찬가게에 들린다. 얼마 전 진열장에 꼬막이 등장했다.
일 년 내내 파는 반찬도 있지만 매실장아찌나 꼬막처럼 그 계절에만 나오는 반찬도 있다.
꼬막은 11월에서 3월이 제철이다.
고흥에서 태어난 엄마는 꼬막을 좋아한다. 양구에서 태어난 아빠는 꼬막을 싫어한다.
꼬막은 해감을 잘 해야 한다. 삶은 다음에도 일일이 한쪽 껍질을 벗기고 양념을 끼얹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나는 꼬막은 좋아하지만 손질이 귀찮아 안 먹는 걸 선택한다.
벌교에서 꼬막 정식을 먹은 적이 있다. 꼬막찜, 꼬막구이, 꼬막전, 꼬막회무침, 꼬막피자, 꼬막튀김, 꼬막찌개, 꼬막샐러드. 꼬막 반찬만 잔뜩이었다. 먹다가 지쳤다.
엄마를 위해 양념된 꼬막을 장바구니에 넣는다. “어머. 꼬막이네.” 반가워할 엄마 얼굴이 그려진다.
* 당근
당근을 좋아하는 아이가 몇 명이나 있을까?
어릴 적엔 양파도 시금치도 싫어했지만 그 중에 제일은 당근이었다.
모양과 색이 예쁜 당근이지만 맛은 번번이 기대를 저버린다. 당근은 요리에 색감을 더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어른이 된 지금도 기름에 달달 볶은 당근은 그럭저럭 먹지만 갈비찜에 들어있는 푹 익힌 당근은 먹지 않는다.
당근 없이도 평생 잘 살 줄 알았는데 몇 년 전부터 당근을 바구니에 담게 되었다.
시력 때문이다. 시력이 나빠지니 눈에 좋다는 건 뭐든 관심이 간다.
당근과 블루베리가 특히 좋다고 한다. 블루베리는 비싸서 매일 먹을 수 없다. 당근은 가능하다.
당근에는 루테인과 리코펜 성분이 풍부해 눈 건강에 도움을 준다.
아침마다 과일 샐러드에 생 당근을 썰어 넣는다. 맛으로 먹는 건 아니다.
그나마 괜찮다고 느낄 때는 겨울이다. 겨울 당근은 확실히 먹을 만하다. 아삭아삭하면서도 부드럽게 씹힌다. 제주 당근은 단맛까지 느껴진다. 겨울에 많이 먹어둬야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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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봉
제철 맞은 한라봉을 한 박스 주문했다. 유부주머니를 닮은 한라봉 껍질을 손으로 쓱쓱 벗긴다.
상큼한 향기가 부엌을 넘어 거실까지 퍼진다. 손끝에도 진한 향기가 남는다.
귤을 확대해 놓은 모양새다. 큼직한 알맹이를 잘라 사과, 당근, 토마토가 담긴 그릇에 넣는다.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과즙이 입 안 가득 찬다. 강렬하다. 점잖은 친구들 사이에서 혼자만 튀어 오른다.
밖의 날씨는 영하 15도.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다. 추위 때문에 정신이 번쩍, 한라봉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드는 아침이다.
* 군밤모자
걸어서 출근하는 남편에게 털모자를 쥐어준다. 올 때 꼭 쓰고 오라고.
갈 때도 쓰면 좋으련만 머리가 눌려 절대 안 된다고 한다. 오늘 같은 강추위에는 귀마개로 부족하다.
체온 손실의 대부분은 머리에서 발생한다. 털모자를 쓰고 밖에 나가면 한결 걸을만하다.
오래 전 양양에 계신 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설 무렵이었다.
할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탈 때 군밤 모자를 쓰는데 새 모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시골 장터에는 큰 모자를 팔지 않는다면서. 서울 살던 내게 연락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키 190
에 풍채가 좋아 웬만한 모자는 머리에 맞지 않는다.
나는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귀를 덮는 모자 중 가장 큰 사이즈를 구해 설날에 가지고 갔다.
그 모자도 할아버지에겐 작았다. 다시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이제 겨울이 다 갔다고 했다.
그해 여름 이태원에 놀러갔다가 ‘큰 사이즈 옷’이라고 적힌 상점을 보았다. 저기엔 큰 모자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생각했지만 그냥 지나쳤다.
날이 더웠고 할아버지가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라는 마음이 들었다.
몇 년 후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군밤 모자를 쓴 사람을 볼 때마다 가끔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후회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없어 마음이 아리다.
* 졸업식
예전엔 2월이 졸업 시즌이었다. 요즘엔 겨울방학 직전에 종업식과 동시에 졸업식을 하는 학교가 많다.
졸업식 풍경도 바뀌었다. 졸업은 작별에서 축제로 변했다.
졸업장을 받으러 단상에 올라 갈 때 스크린으로 아이 사진이 펼쳐진다.
포토월이나 즉석사진 부스를 준비하는 학교도 있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식 때 친구와 악수로 이별을 대신했다. 요즘 학생은 친구와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스’를 찍으며 영상을 남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건 꽃이다. 졸업을 축하하러 온 가족에겐 어김없이 꽃다발이 들려있다.
달라진 건 졸업식 꽃다발을 당근에서 반값에 살 수 있다는 거다.
내일 졸업이라면 오늘 졸업식을 마친 꽃다발을 당근에서 구입하면 된다. 꽃다발도 여러 사람 품에 안겨 기분이 좋을 거다.
* 낮과 밤
낮이 길어진다. 오후 다섯 시만 되면 몰려오던 어둠이 뒷걸음질치고 있다.
늦은 오후 건물 안에서 운동을 마치고 나와도 밖이 환하다. 해가 아파트 중턱에 걸려있다.
아침 햇님도 기상 시간을 앞당겼다. 마음에 들 정도는 아니다.
낮이 길어질수록 밤은 줄어든다. 봄이 곧 온다는 신호다. 봄이 오면 여름도 온다.
사랑하는 여름이 오면 맨발로 뛰어가 맞으리. 겨울아 고마웠어. 이제 그만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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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그리기가 취미인 모과와 독서가 취미인 유자의 일상 이야기. 유자는 쓰고 모과는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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