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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계절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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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Aug 17. 2024

2월


* 입춘 


24절기의 시작인 입춘이다. 남쪽에는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윗동네도 기온이 성큼 올랐다. 맨다리로 걸어도 춥지 않다. 

한옥마을 대문에는 ‘입춘대길 건양다경’ 이라 쓴 입춘첩이 걸렸다. ‘봄이 왔으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런 일이 많이 일어나길 바란다’ 는 뜻이다. 

봄을 기다린다. 봄에는 왠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화난 사람, 우울한 사람, 슬픈 사람도 봄 앞에서는 한결 밝아지지 않을까? 

새 화분을 다섯 개 샀다. 아비스. 히아신스. 피쉬본. 박쥐란. 호프셀렘. 

봄에게 잘 보이려고 집 단장을 했다.          



* 떡국  


떡집 뒤쪽으로 떡판이 가득 쌓였다. 온 국민이 떡국 먹는 날. 설이다. 

설날 아침 우리는 떡국 한 그릇을 먹고 한 살을 먹는다. 떡국을 안 먹을 수는 있지만 나이를 안 먹을 수는 없다. 

떡국을 두 그릇 먹을 수는 있지만 나이를 두 살 먹을 수는 없다. 세월은 한 치 오차 없이 흘러간다. 

조카들은 아이에서 청소년이 되고 어른들은 중년에서 장년이 된다. 

늘어나는 주름과 흰머리를 보며 막을 수 없는 죽음을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가족들이 모여앉아 떡국을 먹는다.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흰떡을 꿀떡 꿀떡 삼킨다.      


     

* 봄바람  


집 안 공기가 달라졌다. 난방을 하지 않았는데도 훈훈하다. 

창문을 여니 바람이 훅 들어온다. 봄바람이다. 

이런 날은 가만히 있기 힘들다. 맨투맨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머플러를 두른 후 집을 나선다. 

낮 최고 온도는 17도. 영춘화가 3월인 줄 착각하고 꽃 피우기 좋은 날이다. 

남편 회사 근처 공원에서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다.

점심시간에 맞춰 토스트와 오트밀 라떼를 들고 공원에 앉는다. 야외에서 먹으니 식욕이 왕성해진다. 

바람이 부드럽게 스친다. 지나는 사람들 표정도 부드럽다. 애쓰지 않아도 기분 좋은 날이다. 

봄이 손에 잡힐 듯 말 듯 하다.           



* 딸기 


마침내 딸기를 샀다. 어렸을 땐 봄이 와야 딸기 구경을 했다. 

요즘은 12월부터 딸기가 매장에 진열되기 시작한다. 겨울이 제철인 것처럼. 

하우스 딸기는 크고 싱싱하다. 마트에 갈 때마다 가격을 확인한다. 

아직 먹을 수 없다. 두 달 반을 참았다. 노지 딸기는 나오지 않았다. 하우스 딸기는 이제 먹을 만한 가격이 되었다. 

스티로폼에 든 딸기 한 박스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딸기 30알이 가지런히 담겨 있다. 아껴 먹어야지. 

한 알을 씻어 맛을 본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당도가 높다. 

설탕물을 먹여 그렇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달콤하다. 탕후루라 해도 믿겠다. 

노지 딸기와는 다른 맛이다. 봄이 코앞이다. 딸기를 마음껏 먹을 날도 멀지 않았다.      


     


* 히아신스  


히아신스, 크로커스. 수선화. 초봄은 구근식물 싹이 돋아나는 시기다. 

온라인 농장에서 히아신스를 주문했다. 꽃봉오리가 수줍게 잎에 싸여 있다. 

화분을 바꿔주자 이튿날부터 꽃이 피기 시작한다. 자고 일어나면 팝콘 터지듯 꽃망울이 활짝 펴진다. 

꽃대도 쑥쑥 자란다. 꽃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기울기 시작한다. 

젓가락으로 지지대를 세워준다. 부엌을 오갈 때마다 허리를 굽혀 향기를 맡는다. 

6일째 꽃이 피고 있다. 23개 꽃망울이 남아 있다. 잎 안에 숨겨진 꽃대가 하나 더 있다. 

나올지 확신할 수는 없다. 영양제를 뿌리고 물을 주며 응원할 뿐이다. 

아름다운 존재를 지켜보는 일은 기쁘다. 꽃은 아이처럼 예쁘고 아이처럼 연약하다. 

꽃은 하루하루 정성을 다해 핀다. 있는 힘껏 중력을 거스르고 자라난다. 

히아신스 꽃향기에 홀려 봄이 왔다가, 올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꽃향기를 맡는다.          



* 사순절  


성당 다니는 은진이가 카톡을 보내왔다. 사순절 기간에 TV 시청을 하지 않고 말을 조심하겠단다. 친구는 오감을 절제하고 싶다고 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부활 주일 40일 전부터 시작된다. 일요일은 제외한다. 

친구는 매년 사순절을 잘 지킨다. 나는 매년 사순절을 대충 지킨다. 

교회마다 사순절 기간 행사가 다르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40일 특별 새벽기도를 한다. 

이번에 참여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마흔 넘도록 새벽기도를 제대로 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걸어서 교회까지 10분이면 간다. 의지만 있으면 된다. 

친구에게 답장을 보냈다. 

나도 40일 새벽기도 참석할 거야. 사순절 지나고 따뜻한 봄에 만나자.      

    


* 우수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우수다. 하루 종일 보슬비가 내린다. 어제도 비가 내렸다. 

해가 나지 않으니 몸이 무겁다. 눈이 감긴다. 

내일과 모레도 비 소식이 있다. 날이 흐리면 마음이 축축해진다. 

날이 맑으면 마음이 경쾌해진다. 날씨가 마음을 이리저리 흔든다. 

날씨를 바꿀 수는 없다. 마음을 바꿀 수는 있다. 

흐린 날에는 더 자주 웃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 

풀과 나무는 비를 맞아 기분이 좋을 거다. 땅 속에서 자고 있던 씨앗도 잠에서 깨어난다. 

곧 초록 새싹이 나올 것이다.          



* 춘설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엎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새벽 4시 50분. 따뜻한 물을 마시며 거실 커튼을 젖힌다. 

근데 오늘, 왜 이리 환하지? 나무 가지마다 눈이 내려앉았다. 

나무는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가지를 쭉쭉 뻗어 눈을 끌어안는다. 

하얀 눈송이들이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땅 아래를 살핀다. 정지용의 시 ‘춘설’이 떠오르는 아침이다. 

싸리 눈이 내리고 있다. 창문을 연다.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와 넉가래로 눈치우는 소리가 섞여 들어온다. 나무로 우거진 집 앞 공원은 영화 속 풍경처럼 새하얗다. 벚꽃이 활짝 피어난 것 같다. 

흰 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하늘이 주는 깜짝 선물이다.     


      

* 온난화  


전국에 걸쳐 매화 개화 시기가 빨라지고 있다. 매화는 보통 2월 중순에서 3월말 사이에 핀다. 

올해는 11일에서 45일 일찍 피었다. 제주도 매화가 1월 중순에 개화했다. 

포항과 광주는 2월에 꽃망울이 터졌다. 벚꽃 시즌도 점점 빨라진다. 

전 세계적으로 이른 봄이 오고 있다. 

율전 약수터 가는 길에 있는 산수유도 노란 꽃망울이 나왔다. 꽃 핀다고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지만 설레는 마음 어쩔 수 없다.

집 앞 목련 꽃봉오리가 벌어질 듯 말 듯 하다. 꽃들의 축제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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