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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10. 2019

특별할 것 없던 열네 살의 소녀

진공 상태 4부



아니나 다를까, 윗배가 바늘로 찌르듯 아파오기 시작했어. 화장대 위에 사탕처럼 굴러다니는 알약을 여덟 개나 발견하고는 ‘어차피 인생은 태피스트리’ 라며 가장 커다란 약을 꼴깍 삼켜버렸는데, 안타깝게도 사십 오분 가량이 지난 지금 나는 두통과 복통에 울렁거림까지 덧입은 채 휴지조각처럼 침대 귀퉁이에 구겨져 있어. 역시 8분의 1의 확률은 무리였던 건가. 


오늘은 너에게 말하지 않았던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해. 지금도 그렇게 박력 있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소극주의자였거든. 오랜 친구들 덕분에 학교 생활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학급 번호 이십 번인 해에는 매월 이십일마다 창문을 깨고 날아가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어. 남 앞에 나서는 일이라는 건 벌레를 집어먹는 일보다도 끔찍했다는 뜻이야. 내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질 때마다 늘 병원 신제 진다는 건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테니 자세히 적지 않아도 되겠지. 그러니까 이건, 그에 얽힌 어느 오랜 과거의 이야기야.


짧은 단발머리에 특별할 것 없던 열네 살의 나에게는, 함께 어울려 놀던 네 명의 아이가 있었어.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들 중 하나였어. 세상이 제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걸 견뎌내지 못하는 아이였달까. 솔직히 말하자면 전형적인 영화 속 캐릭터였어. 하이틴 영화에 나올법한 '못된 년' 말이야. 한쪽 눈 언저리에 약간의 흉터를 가지고 있는 아이였는데,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상처에 대해 가장 예민하게 굴었던 건 슬프게도 언제나 그녀 자신이었어. 


그 아이는 조금이라도 자신이 소외된다는 느낌이 들면 늘 발작처럼 화를 내곤 했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친구들을 괴롭히는 일이 부지기수였지. 그 아이가 친구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따돌리는 일을 게임처럼 즐기는 동안,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피해자가, 또 방관자가 되고 말았어. 사나운 늑대의 포위망에 사로잡힌 양 떼 같았달까.


그 친구의 공격 타깃이 나이던 시절, 예상했던 일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일어났어. 점심시간, 음식을 받아 교실로 들어가던 내가 식판을 내동댕이치며 쓰러지고 만 거야. 그 후로 교실이 꽤나 아수라장이 되었다는데 나는 누군가에게 업혀서 덜컹거리던 몇 분의 기억밖에 없어. 정신을 차려보니 텅 빈 양호실이었고, 눈을 뜬 지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눈에 들어온 건, 양호 선생님도 다른 친구들도 아닌 그 '못된 년'이었어.


'불쌍한 척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정말 구질구질하다, 그렇지?'


그 아이가 가고 난 후 나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아이처럼 울었어. 어쩌면 그 철없는 말이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버린 걸까. (토씨 하나 잊지 않고 그대로 기억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아) 그 날 이후 나는 내 몸의 이런 반응들이 너무 싫었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 어디가 아프거나 하는 것들 말이야. 그 비슷한 전조라도 느껴질 때면 언제나 자존감이 낮아졌어. 숨기려는 노력도 꽤 많이 했는데 잘 숨겨지지는 않더라. 이건 마치 누군가에게 죄책감을 주려 내가 '일부러' 몸에 고통을 주고 있는 것 같잖아. 




글. 지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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