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영업글
'윤탬버린'이라고 불리는 여자가 있다. 개저씨 상사들이 회식에 참석해라, 술잔을 채워라, 노래를 불러라, 명령을 해댈 때 군말 없이 비위도 좋게 탬버린을 흔드는 윤진아(손예진 역)에게 회사 동료들이 붙인 별명이다. 그런 진아가 회식(이라고 부르고 접대라고 읽는 것)을 거부하고 상사에게 보기좋게 한 방 먹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상사는 당황하며, 동료들은 반가워하며 다들 윤탬버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의아해한다. 윤탬버린의 반격을 시작으로 회사 내에는 여직원들의 대상으로 성추행에 대한 설문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제 발 저린 상사가 진아에게 소고기를 사먹이며 달래다가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냐고 묻는다.
진아의 답변, "어떤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서요. 그동안 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르고 살았거든요. 근데 나보다 나를 더 소중히 생각하고 지켜주기 위해 애쓰는 어떤 사람을 보면서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 사람이 덜 걱정하게, 안심할 수 있게, 내가 내 자신을 더 잘 지켜나가야겠다.."
이 장면을 보며 여성이 페미니스트일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변화시켜주는 연인이 얼마나 귀한 지 새삼 깨닫는다. 물론 이 드라마에서 진아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아이린 사태처럼 "손예진 넌 내 신붓감 리스트에서 아웃이다"라는 선언들이 들끓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아가 자신을 좀 더 존중하기로 결심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고, 동료들에게 힘을 불어넣기도 하는 그 과정이 페미니즘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래들과의 수다 내용을 미루어볼 때, 젊은 여자가 젠더적인 불평등을 체감하는 최초의 경험은 주로 1) 남형제와의 비교 속에서 2) 남자친구와의 관계 속에서이다. 1)이 짜증과 불만을 불러일으키지만 구세대의 사고방식이겠거니 이해해버리고 부모의 내리사랑을 받으며 삭혀지는 것이라면, 2)는 일대일관계에서의 권력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경험이다. ‘이 남자가 나의 자존감을 짓밟을 수 있다’, ‘내게 물리적 폭력을 가할 수 있다’라는 위험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마저라도 인지가 된다면 다행이고 많은 경우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가려지곤 한다. 세상 사랑스럽게 웃고 신발끈을 매어주면서 “나는 여성혐오자가 아니야. 내가 여자친구를 얼마나 사랑하는데!”라고 생각/말하는 남자들이 얼마든지 있다. “널 사랑해서 하는 조언인데, 페미니즘 이야기 좀 하지마”라고 말하는 남자도 보았다.
진아의 엄마는 공부하는 아들에게는 무한한 우쭈쭈를 보내면서 진아의 노동행위는 평가절하하고 얼른 좋은 집안에 시집가지 못하는 것을 책망한다. 진아의 회사는 진아의 가치를 직원이 아닌 여성인 데서 더 찾는다. 진아의 전 연인 규민(오륭 역)은.. 에휴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진아가 윤탬버린이 된 것은 진아 자신의 성격과 선택에서 비롯된 것으로 묘사되지만, 규민이 진아를 고작 탬버린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았던 것과도 무관하지는 않을테다. 규민은 진아가 자신이 원하는 여성성을 발휘해야, 즉 자신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자신의 우월성을 보장해주는 여성성을 발휘해야만 사랑해주었을 거라는 거다. 진아는 규민과의 관계가 박살난 뒤 자신을 보다 동등하고 존중받을 인격으로 세워주는 준희(정해인 역)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평가절하되어 왔고 그것을 자신이 수용해왔는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아, 물론 이 드라마가 대단히 훌륭한 페미니즘 텍스트는 아니고, 저 대사에서 내가 뽑아내는 깨달음과 드라마 속 연애 모습이 착 달라붙지는 않는다. 준희가 자주 진아를 단속하고 과잉보호하려고 하면서 ‘damsel in distress’가 계속 재현되는 중이다. 그래서 진아의 대사도 결국 “나는 준희꼬니까 건드리지망!” 정도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그러니 더 두고 볼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드라마가 직장내 성희롱 대처와 직장밖 연애담을 한 스토리로 묶는 방식은 흥미롭다. 직장인 여성에게 연애란 일과 충돌하는 방해물 아니면 일을 잘하게끔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도구로 재현되곤 하는데, 옳은 연애는 이런 좋은 empowerment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드라마로부터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