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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 Aug 31. 2024

아트 하는 언니들과 갤러리 데이트

 

  어떤 모임이건 간에 창시 멤버라는 타이틀은 힘 있는데, 이는 말하자면 그 시작부터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함께 기억하고 논할 수 있는 배지 같은 걸 달게 되는 거다. 20대 중반, 반짝반짝 빛나던 날, 토요일 오전 영어 토론 동호회의 창시 멤버가 되어 아랍으로 건너오기 직전까지 멤버들과 보낸 눈부신 날들이 있었다. 그 시간은 아직까지도 나의 삶에 가장 찬란하고 소중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다시 못 올 시간이란, 그런 청춘 시절의 아름다운 모임을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어느 날, 현지 한인회 사이트에는 미술 콘텐츠 협회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멤버 구인 포스팅이 올라왔다. 어떤 모양의 협회가 생겨 나는 건지 궁금 하기도, 현지에서 졸업한 미디어 매니지먼트 석사가 있으니 어쩌면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설렘이 뭉게뭉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잽싸게 조인 신청 메일을 보내고 제법 날들이 흘러 어느새 그를 잊고 있던 어느 날. 부랴부랴 오늘도 출근을 이뤄낸 오전시간, 협회의 회장님한테서 이메일 한통이 와있었다. 곧 있으면 열릴 협회 창단 오프닝에 참석 여부를 묻는 RSVP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희열이란. 걸어온 길에 아트와의 접점은 없었으나 난 늘 예술을 흠모하던 아이였다. ---



  하지만 돌고 돌아, 삶은 끝내 당신이 보고파하는 걸 보여준다. 삼십 대가 되니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의심과 불안, 부담감, 이십 대에 가졌던 그 모든 무거운 응어리들을 놓을 수가 있었다. 아랍으로 나오면서 자연스레 나 자신에게 스스로 가졌던 자부심 이라든지 정체성이라는 편견, 그 어떤 형태도 많이 놓았다. 삶은 태풍을 데려오고 자연스레 휩쓸리고 또 흘렀다. 어느새 삼십 대 중반 역에 서있는 나를 만난다. 학사에 이어 영어 교육을 전공할 뻔한 대학원에서 초반에 어쩔 수 없이 전공을 변경해 크리에이티브 산업인 미디어 매니지먼트를 공부하게 됐고, 코로나와 함께 제주로 갔다가 엑스포라는 무대포 덕분에 두바이를 다시 만나게 됐다. 그 덕에 만난 영국인 남자친구의 직업은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더군다나, 상상해 본 적도 없던 글을 쓰겠다며 난 지금 에세이를 끄적이며 작가 흉내를 내고 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작가지 네가 무슨 작가야. 무거운 감정들이 올라오면 난 또 그들을 버리고 힘을 뺄 거다. 하지만 이번엔 계속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거지. 그거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아랍에 최초로 생긴 한인 미술 콘텐츠 협회의 초창기 멤버로 들어가 소셜 미디어 콘텐츠를 만들고 기획하면서 얼떨떨하게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반년을 보냈다. 아트에 진심인 나와 제임스는 얼떨결에 협회의 로고도 뚝딱 만들어 버렸다. 아랍 아트 전시회에 협회 작가님들이 참가하려면 당장 로고부터 필요했는데, 둘이 맞대어 만든 디지털 캘리 그라피가 뽑혀 버린 거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협회는 이런 식으로 아랍에서 열리는 아트 전시회에 한국관도 참가해서 우리 아티스트분들의 재능도 빛내고, 지역에 한국의 멋을 알리는 문화 외교도 굳건히 하자 하는 취지로 만들어진 단체였다. 이후 총영사관에 입사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협회에서는 빠지게 됐는데, 한 예술 단체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더불어 소속 작가님들이 참여하는 전시회를 좇아 다니며 그 현장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었던 건 내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 


--- 그리고 오늘의 이 만남이 빚어진 거다. 이유가 있어서 맺는 인연보다는 그 사람이 매력 있고 좋아서 이어가게 되는 인연은 훨씬 힘 있다. 거추장스러운 레이블 다 떼고, 오롯이 너와 내가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해지니까. 한 해가 넘는 시간을 꽤나 정치적인 곳에서 보내고 엉망이 된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다시 한 움큼 빛을 받아낸다. 대화란 것은 참 힘 있다. 내가 가진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던 생각들이 같은 이를 만나 확장하고, 내 사전에 없던 기막힌 정보들이 내 안으로 스며든다. 결이 같은 사람들과의 대화는 참 힘 있다. 이렇게나 날 한자한자 꾹꾹 눌러 써내려 가게 할 만큼. 삶은 결국 내가 보고파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난 너무 무겁지 않게 힘 빼고, 두둥실 꿈꾸며 살아보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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