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진짜 두바이를 모르는 분들을 위하여
여행지에 가서는 무작정 걷는다. 걸어야만 만날 수 있는 그 도시의 진짜 풍경이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제주 살이를 시작할 무렵, 게스트 하우스에서 한 언니 분을 만났다. 그녀는 육지에서 차를 가지고 와 여행 중이었다. 차의 트렁크 속에는 작은 자전거도 하나 싣고서. 이후 제주 살이를 마치면서 느꼈던 것은 그녀가 진정한 여행 고수 였다는 거다.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기며 보는 그림같은 제주와, 자전거 위에 앉아 바람 타고 바닷가 마을을 가로질러 보는 낭만적인 제주, 그리고 꾹꾹 걸음을 옮기면서만 볼 수 있는 구석구석 동화같은 제주의 모습을 그녀는 모두 즐겨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당시 매일 자전거만 타고 다니던 나에게 재충전을 마치고 다시 육지로 올라가던 그녀가 전수해 주고 떠난 한가지 팁이 그거였다.
"자전거 너무 시원하고 좋죠. 그런데, 한번은 걸어봐요. 걸으면 또 보이는 게 많이 달라."
오만 가지 매력을 품고서 도시는 우리들을 부른다. 자그마치 오만 가지 매력이라 했다. 어떤 숨은 보석들을 만날지 언정, 정해진 답 같은 건 없고 그곳을 즐기고 느껴내는 것은 오롯이 우리 각자의 몫. 그래서 난 궁금한 곳을 찾아가 무작정 걷는다. 나만의 방식으로 도시의 새로운 조각들을 발견하고 알아가는 즐거움은 거기에서 온다. 오늘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네로 향해 보려 한다. 두바이의 과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얼얼한 곳, 진짜 두바이를 볼 수 있는 올드 타운으로.
Friday 8pm, 고대해온 밤의 헤리티지 빌리지 산책. 알시프(Al Sheef) 지역엔 머리와 꼬리, 두 군데 주차장이 있다. 만보 수준의 걷기를 원할 때는 머리에, 그 이상을 원할 땐 꼬리에 주차를 하고서 걷는다. 이날은 두바이 커피 박물관이 있는 머리 쪽에 주차를 하고는 워쿄(Wokyo) 누들 숍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이는 부둣가를 따라 걷는 일정인데, 당신이 있는 계절이 두바이의 겨울(11월 - 3월)이라면 낮이고 밤이고 걷기에 행복만 할 것이고, 여름이라면 이 저녁 시간이 유일한 찬스다. 마즈미(Mazmi) 커피 집까지 부둣가를 따라 닿고 나면 자연스레 수크를 통과하게 되고, 여전히 부둣가를 따라가면 첫 번째 선착장이 나온다. 거기서 조금 더 걸으면 어서 와서 맛 보라는 호객 행위로 시끌시끌한 음식점가가 펼쳐지는데, 난 하필 여기가 늘 궁금했다. 탁 트인 부둣가의 테라스 석 이라니 분명 보석 같은 자리. 헌데, 지나다니는 행인들을 잡으려는 식당 직원들이 만드는 시장 같은 분위기는 또 부담스러운 거다. 그렇게 아쉽지만 싫은 척하며 지나쳐 온 게 몇 번이 쌓였다. 여태 우아함은 혼자 지켜 내왔지만, 오늘은 진짜 도시를 봐야 했다. 오늘만큼은 꼭 그곳에 앉아 보리라 마음 먹는다. 그 산만한 분위기 속에는 말로 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나를 당기고 있었다. 오늘은 용기를 내야 했다.
앞뒤로 식사하는 현지인 가족들, 티와 함께 시샤를 즐기는 연인들, 그리고 끊임없는 호객 행위를 통해 십분 전 나처럼 긴가 민가 하고 들어오는 용기 있는 여행객들이 가득히 모여 앉아 열을 이뤘다. 우리는 그들이 내어오는 훌륭한 씨푸드 음식을 먹으면서 마치 거울 속을 들여다보듯 크릭 맞은편으로 늘어선 헤리티지 빌리지의 불빛을 바라본다. 그야말로 완벽한 그림이었다. 그것은 일단 마음 열고 이곳에 녹아 들면 오늘 하루가 더 특별해질 거라는 즐거움의 약속이었다. 그 약속은 오직 용기 내어 마음을 열고 들어간 자들만이 맛볼 수 있는 특권이었고. 오랜 궁금증이 명료하게 느낌표를 달고 말았다. 오늘밤 발견한 원석 하나를 주머니 속에 넣으며 이곳에서 남은 시간 더 용감히 보내겠다고 다짐해 본다. 진실하게, 마음 가는 곳이 있다면 항복하고 달려가 경험해 보겠노라고.
귀한 밤은 영화 같은 산책으로 이어졌다. 얼얼한 빛들을 더 가까이에서 느껴보고 싶었다. 몇몇 사람들이 이미 벤치 곳곳에 앉아 빛 속에 둘러싸여 전율하고 있다. 그들은 아름다움 앞에 솔직했다. 자신의 욕망의 소릴 듣고서 두 손 두 발 들고 달려 나올 줄 아는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인생을 즐겨내는 법을 이미 깨우친 고수들일 거라. 마치 제주에서 만났던 그녀처럼.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산책길이 이어진다. 몇 척이 되는 배들이 불빛을 달고 유유히 헤엄치며 우리의 벗이 되어주고 있었다. 어디까지 걸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걷다가, 서서히 인적이 드물어지고 왼쪽에 놓인 푸른빛 표지판 하나가 보인다. 보행자 용 지하도가 마련되어 있다는 신호였다. 도통 처음 들어보는 올드 타운에 지하세계의 존재는 우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고, 생각도 전에 걸음은 이미 그 새로운 세계를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취침 금지, 카드놀이 금지 같은 이색적인 표시들이 두바이의 지하도는 얼마나 다를까 하는 기대감을 부풀려 갔지만, 펼쳐진 그것은 그저 베이지색의 반듯한 지하도였다. 이런, 아름다운 뷰에 젖어 방심 했다니. 올드 타운에서는 럭셔리를 기대 말 것. 이곳은 진짜들로 충분하니까 (버두바이에서 데이라까지 지하 세계를 통한 순간 이동은 약 오분 소요.) 금시장을 가진 데이라(Deira)로 고갤 드니 새로운 복합단지가 생겼다고 반짝반짝 알 전구들이 늘어서 이를 알리고 있었다. 이런 곳에 에어비앤비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건설적인 상상에 잠시 잠겨 본다. (그 앞에 진짜 인도에서 온 요가 선생님이 하시는 요가 스튜디오도 하나 있는 거지. 그럼 난 이 동네에 한 해 살이 하러 이사 오게 되는 거지..) 흥미로운 상상을 이어가 본다. 그런 재미있는 상상은 결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곤 하니까. 그리고 부둣가 쪽을 계속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눈앞에 베니스가 펼쳐진다. 아, 맞은편에서 바라보는 올드 타운은 또 이렇게나 아름다웠구나.
걷기 여행을 마칠 준비가 됐다면 첫 번째 선착장, 아직 맛있는 망고 주스를 먹을 힘이 남았다면 정답은 조금 더 떨어진 두 번째 선착장이다. 거리 한쪽에 마치 한국의 포장마차 같은 스트릿 레스토랑에 잠시 앉아 그 한 잔을 맛있게 즐겨내자. 그것이 당신을 머지않아 이곳으로 다시 데려와 줄거다. 주차장을 향해 크릭을 다시 건너는 길에는 1 디르함 짜리 낭만 동동배에 올라탄다. 낭만 없이는 현실 행이 다 소용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