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명하고 똑똑하지만 그어진 선을 잘 지키며 사는 (정해진 시장 가격은 자꾸만 깎아 대는 아이러니한 그녀지만) 신기하게도 패션을 아는 의외인 심미안을 가진 토끼띠 엄마와, 그 외모에 노래도 무척이나 잘하면서 (내가 꿰뚫어 보기에 그는 자유로운 아티스트의 영혼을 가졌으나) 성실하고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삶에 순응하며 살고 있는 돼지띠 아빠 사이에 태어난 나. 세 남매 중 둘째 딸로, 성실하고 어린 시절부터 할 말은 다 하며 일등을 밥 먹던 호랑이 띠 언니와, 공부하라 안 시켜서 그거 하나는 엄마한테 크게 감사하다는 양띠에 막내로 자유롭고 순한 남동생 사이, 난 신비로운 용띠로 태어나 집안에서 말수가 적고 자기껀 알아서 잘 챙기는 둘째로 자랐다.
정말 다른 다섯 사람이 한국 사회 안의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일정 시간을 보낸 것은 나라는 한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게 분명했다. 자유를 택한 남동생과 성실을 택한 언니 사이에 모와 도, 그 둘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분주했던 것이 나였으니까. 한 가지 분명한 건, 나는 타고난 모험가였다. 하지만 집안 분위기를 크게 거스르고 싶진 않았던 거지. 어릴 적, 모험을 다니느라 울타리를 넘다 치마가 찢어지고 턱이 쓸려도, 나 아픈 거 보단 나무랄 엄마가 두려워 옥상에 쪼그려 앉아 몇 시간을 고뇌했고, 주말 학교를 땡땡이치고 도시를 너머 좋아하는 가수를 보러 간걸 친구가 자기 엄마에게 들켜 우리 집까지 쪼로로 전화가 왔으나, 단호하게 “우리 딸은 그럴 리가 없다”며 되려 그녀를 이상한 사람이라 부르던 엄마의 모습을 보고 숨죽여 크게 감동하던 나였다.
엄마의 소망은 언니를 학교 선생님을 시키고 나를 의사를 시키는 거였다. 그리고 언니는 정말로 엄마의 바람대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그녀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나만의 온전한 기쁨과 엄마의 희망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오늘도 날지도 앉지도 못하는 나비 같은 것. 얼마 전 휴가 때 한국엘 들어가 언니의 예쁜 아들과 딸을 만났다. 태풍 속에서 춤을 추던 사이, 어느새 나에게는 조카가 둘이나 생긴 것이다. 나 역시 엄마가 원했던 대로, 평범하게 나를 잘 눌러 담아 살았다면 지금쯤 같은 동네에 아이들 데리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여전히 한 공동체로 잘 지내고 있었을까? 이십 대에는 남들과 다른 삶을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평범함도 더는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 되고 나면 그것은 더는 평범한 게 아니다. 그러니 특별함, 평범함을 좇을 게 아니라, 나는 오롯이 내 자신이 되면 돼. 돌아오는 여덟 시간 짜리 비행기에 앉아 나에게 말한다.
아랍에 남아 글을 쓰겠노라 다짐하고는 하루 네 시간씩 앉아 쓰고 간혹 주어지는 번역과 통역을 하던 중, 매해 열리는 국가 행사 시즌이 왔다. 아부다비에 있는 한국 대사관을 통해 난 청와대 경호관 팀의 통역을 담당하게 됐다. 대사관 건물과 에미레이트 궁전을 오가며 손에 땀을 쥔 그 역할을 해내고 있는데, 두바이 총영사관의 한 포지션이 열렸다는 구인 소식이 들리는 거다. 휩쓸리듯 지원서를 내고 면접에 합격, 입사까지 과정은 마치 쓰나미처럼 이어졌다.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당시 제임스는 왜 그런 곳에 들어가 일을 하겠다는 건지 내게 여러 번 물었다. 그가 보기에 내가 한 다짐과 지금 내가 손 위에 놓고 고민하는 이것이 도무지 매칭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말하건대, 난 글을 쓰는 일에 더 깊이 파고들 용기가 부족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자립적으로 설 수 있게 경제활동을 하고 싶었다. 사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은 많았고, 아직 글 쓰는 일을 가지고 경제활동을 한다고 말하기엔 병아리 같은 그 시간을 나는 잘생긴 직장을 입는 걸로 충당하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총영사관에서의 시간은 녹록지 않았다. 비자 사증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일손은 적고 두바이 특성상 비자 신청자들은 쏟아지니 컴플레인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일하는 분위기도 따라서 험악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재외공관이라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는 그 안의 정치적인 분위기랄까 파워 게임이랄까 하는, 보이지 않지만 선명한 그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하루 여덟 시간 나의 영혼을 혹사시키고 집에 돌아오면, 숨 돌리기 바빴지 글을 쓸 시간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장점이었던 넉넉한 점심시간을 이용해 전자책 한 권을 냈지만, 직장을 다니는 일은 내가 원하는 삶과는 멀어지는 길이란 걸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이 깨닫게 됐다. 그렇게 레버리지 당해 나를 버려가며 번 돈이 쓰이는 곳을 가만 살펴보면 그것도 참 허무맹랑해, 착실히 앉아 쓰곤 하던 내가 사무치게 그리워질 때가 되니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소스장에 소스 하나가 더 찼고,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기쁨의 의미를 알게 된 지금이 바로 모든 걸 내려놓고 나에게로 돌아갈 시간이란 걸. 회사를 위해 쓰는 그 시간을 내가 원하는 일, 적어도 진정으로 가치 있다 생각하는 일을 위해 쓰자고.
모든 것에는 타이밍이 있다고 했다. 내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첨벙 뛰어들 만한 어떤 또렷한 사건이 필요했다. 총영사관에서 보낸 일 년 반의 시간이 내게는 정확히 그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