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모임이건 간에 창시 멤버라는 타이틀은 힘 있는데, 이는 말하자면 그 시작부터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함께 기억하고 논할 수 있는 배지 같은 걸 달게 되는 거다. 20대 중반, 반짝반짝 빛나던 날, 토요일 오전 영어 토론 동호회의 창시 멤버가 되어 아랍으로 건너오기 직전까지 멤버들과 보낸 눈부신 날들이 있었다. 그 시간은 아직까지도 나의 삶에 가장 찬란하고 소중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다시 못 올 시간이란, 그런 청춘 시절의 아름다운 모임을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어느 날, 현지 한인회 사이트에는 미술 콘텐츠 협회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멤버 구인 포스팅이 올라왔다. 어떤 모양의 협회가 생겨 나는 건지 궁금 하기도, 현지에서 졸업한 미디어 매니지먼트 석사가 있으니 어쩌면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설렘이 뭉게뭉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잽싸게 조인 신청 메일을 보내고 제법 날들이 흘러 어느새 그를 잊고 있던 어느 날. 부랴부랴 오늘도 출근을 이뤄낸 오전시간, 협회의 회장님한테서 이메일 한통이 와있었다. 곧 있으면 열릴 협회 창단 오프닝에 참석 여부를 묻는 RSVP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희열이란. 걸어온 길에 아트와의 접점은 없었으나 난 늘 예술을 흠모하던 아이였다.
자유를 가진 대학생이 되고서 전공인 영어를 빼고 스스로 자진해 무언가를 배웠던 게 기타 연주였고, 또 데생이었다. 영화를 결제해 다운로드하여 보던 시절, 그 플랫폼에 있는 외국 영화들을 남김없이 털어보곤 했다. 그때 자연스럽게 기타 하나를 마련해 홀로 연주법을 익히고는 몇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된 거다. 편의점 와인을 마를 날 없이 재어 두고 홀짝이게 된 건 덤이었다. 한 여름에는 호주 워킹을 가느라 휴학을 하게 됐는데, 출국일까지 시간이 남아 당시 언니가 사귀던 미술 선생님의 화실을 드나들었던 기억이 난다. 시원한 버스에 올라타 창원의 끝자락에서 마산의 끝, 한 대학가에 닿을 때까지 앉아 난 상상의 나래를 펄럭이곤 했다. 그럼 두 세시 무렵 라디오가 흐르는 화실에 닿게 되고 사각사각 연필 잡고 소묘 연습을 시작한다. 이주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후 그것은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이든 그려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비가 내리지 않는 아랍 생활 속, 비 오는 날의 카페 하나를 내 안에 갖게 된 것 같기도, 가장 친한 소울 메이트를 가진 것과도 같았다. 드로잉을 하고 나면 내 안에 고독이나 외로움이 닦여 나가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또, 한때는 패션을 좋아하는 것을 너머 종사자가 돼 봐야겠다고 꿈을 키웠다. 당시 너무나도 핫했던 미국 의류 브랜드의 대구점에 찾아가 인터뷰를 봤는데 낙방해 버리자, 강남구청 역에 있었던 본사로 직접 찾아가 다시 면접을 봤다. 그러고 얼마 후 홍대점에서 일을 시작하게 돼 학교엔 미련 없이 다시 휴학계를 던지기도 했다. 졸업 전 마지막 학기에는 알랭드 보통, 파울로 코엘료 같은 작가들의 책에 빠져서 강의실보다는 도서관에 숨어 지내기 바빴다. 너무나도 사랑하면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난 그렇게 오래도록 예술이란 것을 짝사랑해 왔다. 그럼 다음은 패션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어야 하는 건가, 내가 정말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디 도움도 못 묻고 혼자 끙끙 앓곤 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당시 내 곁에는 예술과 관련된 일이나 공부를 하는 친구나, 조언을 얻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니, 사실 뻗고 뻗으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용기가 없었지만 난 예술과 예술가들에 대한 목마른 그 상태, 그 고독한 짝사랑을 즐겼던 것 같다. 나서서 직접 그걸 해보면서 어떻게든 집념으로 그것을 이루려는 시도보다, 갖고 싶어 안달이 난 그 상태를 꾸준히 유지했던걸 보면.
하지만 돌고 돌아, 삶은 끝내 당신이 보고파하는 걸 보여준다. 삼십 대가 되니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의심과 불안, 부담감, 이십 대에 가졌던 그 모든 무거운 응어리들을 놓을 수가 있었다. 아랍으로 나오면서 자연스레 나 자신에게 스스로 가졌던 자부심 이라든지 정체성이라는 편견, 그 어떤 형태도 많이 놓았다. 삶은 태풍을 데려오고 자연스레 휩쓸리고 또 흘렀다. 어느새 삼십 대 중반 역에 서있는 나를 만난다. 학사에 이어 영어 교육을 전공할 뻔한 대학원에서 초반에 어쩔 수 없이 전공을 변경해 크리에이티브 산업인 미디어 매니지먼트를 공부하게 됐고, 코로나와 함께 제주로 갔다가 엑스포라는 무대포 덕분에 두바이를 다시 만나게 됐다. 그 덕에 만난 영국인 남자친구의 직업은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더군다나, 상상해 본 적도 없던 글을 쓰겠다며 난 지금 에세이를 끄적이며 작가 흉내를 내고 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작가지 네가 무슨 작가야. 무거운 감정들이 올라오면 난 또 그들을 버리고 힘을 뺄 거다. 하지만 이번엔 계속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거지. 그거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아랍에 최초로 생긴 한인 미술 콘텐츠 협회의 초창기 멤버로 들어가 소셜 미디어 콘텐츠를 만들고 기획하면서 얼떨떨하게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반년을 보냈다. 아트에 진심인 나와 제임스는 얼떨결에 협회의 로고도 뚝딱 만들어 버렸다. 아랍 아트 전시회에 협회 작가님들이 참가하려면 당장 로고부터 필요했는데, 둘이 맞대어 만든 디지털 캘리 그라피가 뽑혀 버린 거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협회는 이런 식으로 아랍에서 열리는 아트 전시회에 한국관도 참가해서 우리 아티스트분들의 재능도 빛내고, 지역에 한국의 멋을 알리는 문화 외교도 굳건히 하자 하는 취지로 만들어진 단체였다. 이후 총영사관에 입사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협회에서는 빠지게 됐는데, 한 예술 단체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더불어 소속 작가님들이 참여하는 전시회를 좇아 다니며 그 현장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었던 건 내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다양한 분들의 이해관계가 섞여 있기에 우여곡절도 많았던 협회였지만, 결국엔 첫날 참석할 수 있었던 창립식 덕분에 나와 비슷한 소중한 인연들을 만났다. 그리고 오늘의 이 만남이 빚어진 거다. 이유가 있어서 맺는 인연보다는 그 사람이 매력 있고 좋아서 이어가게 되는 인연은 훨씬 힘 있다. 거추장스러운 레이블 다 떼고, 오롯이 너와 내가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해지니까. 그녀는 나를 맑다고 표현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삶에서 나를 그렇게 읽고 입밖에 내어준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 내 이름의 뜻을 풀어보면 ‘빛나는 맑고 순수한 마음’인데, 그래서인지 내게 맑다는 표현을 써주는 사람을 보면 왠지 진짜 나를 꿰뚫어 보는 느낌이 든다. 내 눈앞에 그녀는 아트를 풀어 설명하는 이라서 인지 그녀가 보는 세상은 방대했고, 자신만의 것이 있었고, 결국엔 진리 랄까 하는 진짜 중요한 것을 깨닫고 추구하고 있었다. 한 해가 넘는 시간을 꽤나 정치적인 곳에서 보내고 엉망이 된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다시 한 움큼 빛을 받아낸다. 대화란 것은 참 힘 있다. 내가 가진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던 생각들이 같은 이를 만나 확장하고, 내 사전에 없던 기막힌 정보들이 내 안으로 스며든다. 결이 같은 사람들과의 대화는 참 힘 있다. 이렇게나 날 한자한자 꾹꾹 눌러 써내려 가게 할 만큼. 삶은 결국 내가 보고파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난 너무 무겁지 않게 힘 빼고, 두둥실 꿈꾸며 살아보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