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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isie Dec 14. 2020

[책]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

히라마쓰 요코 作

후덥지근하고 습한 늦여름의 어느 밤, 한낮의 열기를 가득 머금은 바닥에 누웠다. 여전히 뜨끈한 바닥은 절로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다. 밤이 되어도 선풍기 바람만으로는 좀체 시원해지질 않았다. 끈적거리는 몸으로 흐느적거리며 누워 있으니, 아스팔트 위에 늘어져 있는 껌딱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그머니 짜증이 올라왔다. 그렇게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차라리 시원한 물이라도 벌컥벌컥 마시면 좀 낫겠지 싶어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흘러나오는 냉기를 맞으며, 벌컥벌컥 냉수를 들이켜니 좀 살 것 같았다. 냉기에 홀려 냉장고 문을 열고 멍하게 있다가-더위에 찌든 나처럼-한껏 뭉그러진 포도를 발견했다.

아차,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괜스레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왜 제때 먹지 않아서 저렇게 또 포도를 상하게 만들었는지, 왜 한 번에 먹지도 못할 양의 포도를-싸다는 이유만으로-잔뜩 구매했는지 스스로를 쥐어박았다.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한참 속이 상해 씩씩거렸다. 문득 얼마 전에 읽은 히라마쓰 요코 작가님의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에서 본 글귀가 떠올랐다.


“좋은 방법이 있었다. 잼을 만드는 것이다. 피차 가장 행복한 때, 냄비 속에서 시간을 멈추게 한다. 그러면 불쌍해지지도 부패하거나 먹지 못하게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 제아무리 상태가 좋지 않은 과일이라 할지라도 잼으로 만들면 고유의 맛과 향이 다시 살아난다. 나는 잠도 안 오는데 잘 되었다 싶어 바로 포도잼 만들기에 돌입했다. 평소 게으름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인데, 이럴 때만큼은 알 수 없는 추진력과 행동력이 있다. 먹고사는 일에는 참 빠릿빠릿하다. 그렇게 나는 오밤중에 잼을 졸이게 되었다.


포도잼은 딸기잼이나 사과잼에 비해 만드는 과정이 제법 수고스럽다. 베이킹소다로 포도알을 깨끗이 세척한 후 중불에서 끓여준다. 포도에서 즙이 나오므로 물을 넣어줄 필요는 없지만 눌어붙지 않게 잘 저어준다. 끓이다 보면 포도 껍질이 떨어져 나오고 슬슬 포도가 물러지는 느낌이 난다. 그럼 이제 살짝씩 으깨주어 버려지는 과육을 줄이고 씨를 분리한다. 이제 채반에 거르면 되는데, 정말 되직하기 때문에 꾹꾹 누르며 저어줘야 한다. 최대한 많은 포도액을 얻을 수 있도록! 자, 이제부터 진정한 포도잼 만들기 돌입이다. 포도액과 설탕을 기호에 맞게-보통은 포도액:설탕=1:1이지만 단 게 싫으면 3:1의 비율로 만들어도 된다-넣고 약불에서 졸인다. 경우에 따라 레몬즙을 한~두 티스푼 넣어준다. 그렇게 또 눌어붙지 않게 열심히 저어준다. 포도잼은 딸기잼과 달리 조금은 흐름성을 갖는 정도에서 멈추도록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잼의 탈을 쓴 양갱이 된다!


내가 정말 야밤에 사서 고생을 했다는 생각에 입이 오리주둥이처럼 빼쭉 나오기 시작했다. 왜 하필 이렇게 고난도의 잼에 도전했을까. 하지만 이러한 불만도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 역시 고되고 단순한 일을 해야 시끄러웠던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법이다. 30분 이상 나무 주걱으로 포도액만 쳐다보며 젓고 있으니 점점 잡념이 사라졌다. 오로지 적절한 점성을 가진 포도잼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나무 주걱에 온 마음을 쏟으며 신경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차분해지니 고요한 가운데 주방을 가득 채운 달콤한 내음이 느껴졌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오롯이 이 새벽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 향긋하고 새콤달콤한 새벽. 그렇게 완성된 포도잼은 예쁜 유리병으로 옮겨 담았다. 식히는 과정에서 점점 양갱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다소 의기소침해졌지만, 역시 맛만큼은 끝내줬다.


“잼은 새벽의 고요함 속에서 졸인다. 세상이 완전히 어둠에 싸여 소리를 잃은 밤 살짝 씻어 꼭지를 딴 딸기를 통째로 작은 냄비에 넣고 설탕과 함께 끓인다. 그것뿐이다. 그러면 밤의 정적 속에 감미로운 향기가 섞이기 시작한다. 어둠과 침묵 속에서 천천히 누그러지는 과실을 독차지한 행복감으로 벅찬 기분이 든다.”
**히라마쓰 요코,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 중에서**


나는 다시 잠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집 안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순간을 맞이하고 싶었다. 기다리는 동안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를 꺼내어 다시 읽었다. 평범한 매일의 음식에 이토록 많은 의미와 감동을 담을 수도 있다니 그녀의 감수성이 부러워졌다. 하지만 부러우면 지는 거니까! 나도 ‘자기만의 맛’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서서히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데운 스콘에 포도잼을 발라 커피와 함께 먹었다. 어스름한 하늘에 오렌지빛이 번지는 것을 바라보니, 나에게도 나른한 행복감이 차올랐다. 말 그대로 맛있는 행복! 가끔은 잠 못 이루는 밤도 썩 괜찮은 것 같다.


밤은 관대하다. 무엇 하나 내치거나 버려두는 법이 없다. 모든 것을 끌어안는 밤의 적요는 아늑하기만 하다. 밤의 시간 안에서 우리는 가장 투명하고 순수해진다. 밤의 어둠에 잠길 때 우리는 더 자유로워진다. 하여 우리로 하여금 내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게 한다. 우리 모두는 밤의 품 안에서 자란다. 그래서 잠 못 드는 밤, 우리는 성장통을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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